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라나라 문화인이나 문화재 유물을 마구 약탈해갔다. 대표적인 문화인으로는 수많은 도공들이라 할 수 있으며, 유물로는 일본 국보급으로 지정된 신라범종과 백제6층석탑, 고려불화와 조선불화, 각종 서적 등등등...
그 중에서도 조선기술의 우수성이라 할 수 있는 신농기구인 탈곡정미기계를 가져갔다.
임진왜란 당시 가가토에서 출병한 신헤이에(新兵衛)라는 왜장은 전쟁 중에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소위 신농기구라는 탈곡정미기를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다.
이 탈곡정미기는 찰흙으로 원통 2개를 만들고, 상하 원통 사이에 떡갈나무로 만든 톱니를 넣어 맞물려 돌아가도록 제작해 원통에 벼를 넣어 두 사람이 돌리면 벼껍질과 알곡이 분리되어 나오도록 되어 있다.
탈곡 정미기는 높이 1.5m, 둘레 1m 정도의 크기로 한 번에 벼를 약 두 말 정도 넣을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 널리 사용했던 탈곡정미기는 소형기계와 대형기계가 있었는데 대형은 크기가 배 이상되어 소를 이용해서 기계를 돌렸다.
왜장 신헤이에(新兵衛)가 약탈해 간 것은 소형 탈곡기로서 이 탈곡정미기는 조선에서 가져왔다 해서 도우스(唐臼)라 이름붙인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했고 문서상으로는 외국인을 지칭하는 당인(唐人)으로 표기했다.
탈곡정미기는 오늘날 오카야마 현 비젠 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에서 출간한 [세계대백과사전]에 보면 임진왜란시 일본은 탈곡정미소가 없었다고 하며 언제 조선에서 들어왔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도쿠가와 막부 때는 일본 신농기구로 호평을 받아 농업문화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뿐인가, 탈곡기를 약탈해갈 때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볍씨도 함께 가져갔다. 수확률이 높고, 품질이 좋으며 맛이 독특한 볍씨였다. 오늘날까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하고 있고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아키바리(赤米) 벼가 바로 그것인데 원래 우리나라 볍씨였다.
왜장 신헤이에(新兵衛)는 신농기구인 조선 탈곡정미기와 우리나라 볍씨를 전리품으로 가져가 자기 마을 고쿠시 신사(國司神社) 신전에 바치고 볍씨는 자기 마을에서 재배하니 소득량이 높고 품질이 뛰어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볍씨가 되었다. 일약 유명해진 신헤이에(新兵衛)는 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조선에서 약탈해간 볍씨로 농사를 지은 맏물을 역시 약탈해간 탈곡정미기로 탈곡해 그 쌀로 떡을 만들고 감주를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오늘날까지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