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이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선조 32년(1599) 10월 19일 울산에 위치한 경상좌병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곽재우는 부임하자 곧바로 본영의 입방군(入防軍) 수를 조사하였다.
조사해 보니, 출신(出身)·군공(軍功)·육군(陸軍)·잡색(雜色)을 모두 합쳐 4천 1백 9명, 그 중 9백 76명은 주사(舟師)에 소속되어 있고, 출신과 군공 도합 1천 3백 70여 명은 순찰사의 관문(關文)에 따라 8월부터 입방(立防)을 면제, 상번(上番)하도록 하였고, 보병(步兵) 4백 30명도 역시 입방을 면제하고 작미(作米)하였으며, 잡색군(雜色軍) 8백 20여 명은 지금 곧 뽑아내어 주사에 소속시킬 예정이고, 원방군(元防軍)과 상번 유방군(上番留防軍)은 모두 4백 89명인데 4조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되 한 조(組)에 입방하는 수는 1백여 명 또는 90여 명이였다.
곽재우는 경상좌병사가 위치한 울산이 지리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군사의 숫자가 너무 적어 왜적의 공격에 어떻게 방어를 할지 매우 고민을 하게 된것이다.
곽재우(郭再祐)는 선조에게 아래와 같이 장계를 올리게 된다.
“... 신이 도산성을 보니, 가등청정이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함락시킬 수 없게 쌓았는데, 비할 데 없이 견고합니다. 또한 끊어진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으니 매우 교묘하여 바로 평지 가운데 생긴 한 개의 산성이며, 외성(外城)의 둘레가 6백여발에 불과하므로 정병 2천 명이 넉넉히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내지의 병사는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가 길이 멀어서 변경에 급한 일이 생기면 병사를 모으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변란을 만나 위급할 때 양식도 없는 군대를 끌고 텅빈 성에 들어가서 지킨다면 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경주와 울산의 군대는 8년 동안이나 적을 토벌하여 전투에 익숙해 있으니, 정병(精兵)이 많지 않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공사천(公私賤)을 가릴 것 없이 본토의 유민을 모두 모은다면 경주와 울산 양부에 수성군(守城軍) 2천여 명은 얻을 수 있을 터이니 이 군대로 영구히 성을 지키게 하소서...“
곽재우(郭再祐)는 군병이 초라하고 모자란 것이 극에 달하였으니 왜적의 방비에 대처할 길이 힘들다고 말하고 있으며 경주와 울산의 전투에 능한 사람을 뽑아 울산성을 지키게 할 것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수성군의 보급체계도 요목조목 설명하고, 군사배치의 전략적 요소를 충분히 설명하여 장계를 올리게 된다.
곽재우가 올린 장계는 선조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