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蔚山府輿地圖新編邑誌』의 ‘임진왜변사적’ 에 함께 실려 있었는데, 이후의 각『울산읍지』에는 이를 분리하여 ‘宣諭記事’라 제목하여 실었다. 출전이 경주읍지인『東京誌』라 하였다. 경상도관찰사 한준겸이 지었는데, 내용 중 선조의 교서는 지제교 박이장이 지었다.
안무어사(安撫御史)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이상신(李尙信)이 영남에서 돌아와 복명하고 서계를 올렸다. 그 대략에, “경주 울산의 여러 장사들이 요해처에 분거(分據)해서 힘을 다하여 왜적을 막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동도(東都)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어찌 은전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옳다고 하시고, 신(臣) 한준겸(韓浚謙)에게 유시하시기를,
“지금 이상신의 서계를 보건대 경주와 울산 두 고을이 힘써 싸운 공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장차 어사를 보내어 위로할 것이니, 경은 주육(酒肉)과 목포(木布)를 많이 준비해서 어사가 도착하는 날에 음식을 차려 호궤(犒饋)하고 상품을 반급(頒給)하여 나의 뜻을 유시하라” 하였다.
선유어사(宣諭御史)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윤휘(尹暉)가 교서 한 통을 받들고 말을 달려 경주부에 이르러 두 고을의 장사들을 모아놓고 날을 잡아 교서를 반포하였다. 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다 도적들이 은혜를 저버리고, 방자하게도 포악한 흉모를 꾀하여 변방의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실함(失陷)되었으니,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참혹한 화를 차마 볼수 없게 되었다. 저들이 승승장구하여도 막을 수가 없었으니 대세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남기에 급급 하는데도 너희들은 오히려 몸을 떨치고 일어나 적개심을 가지고 전공을 세웠다. 만 번 죽는 위험 속에서도 적을 사로잡고, 상처를 싸매고 흐르는 피 마시기를 몇 번이나 하였던가. 무릇 백성들이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누대(累代)에 걸친 임금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요, 백성들이 각기 나아가 싸운 것은 실로 너희들의 충분(忠憤)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거처할 집조차 없으니 이미 얽매일 것이 없었고, 창과 칼을 들고는 나라 지키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너희들이 혈혈단신의 몸으로 기세등등한 적에게 항거할 줄을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갑옷입고 전마 타고 싸우느라 몇 해 동안이나 호갈(虎鶡)에서 캐가 끼었고, 창칼 곁에서 쌀을 일어 밥을 짓고 밤마다 화살통 방패를 베고 지새웠다. 처첩(妻妾)은 즉묵성(卽墨城)의 항오(行伍)에 편성되고, 수양성(脽陽城) 만큼의 조그마한 후원도 끊어졌다. 달이 가고 시절이 지나도 오히려 모구(旄丘)의 탄절(誕節)을 탄식하고, 해가가고 가을이 쌓이니 선조 산소에 떨어지는 낙엽을 얼마나 느꼈을까. 너희들은 아홉 번 죽다가 한번 살아났고, 나라도 거의 망했다가 다시 세워졌다. 강역(疆域)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의지할 만한 보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이 일찍이 의를 떨쳐 앞장서지 않았다면 나라는 남쪽 땅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마땅히 때를 넘기지 않고 공에 보답하는 상을 주어 적과 싸운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흉적(凶賊)이 지금에 와서 지나갔으나 나라의 험난함은 예와 다를 것이 없다. 이 때문에 포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지 어찌 감히 너희들을 잊어서이겠느냐.
숭장(崇奬)하고 포상(褒賞)하는 전례(典禮)가 오랫동안 늦어졌고, 전대와 자루를 풀어 배불리 공궤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부덕한 탓에서이니 우휼(于恤)하는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느냐. 그래서 내가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너희들의 7년간 쌓인 고통을 위로하여, 장사들의 싸우고자 한 기상을 격려하고 백성들이 환란을 싫어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어찌 너희들의 공을 족히 보답할 수 있겠는가마는 애오라지 이로써 나의 생각을 펴고자한다. 하늘이 높아 해가 멀어도 해를 따르는 해바라기의 정성을 잃지 않음이 가상하고, 골짜기가 멀고 숲이 깊어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가 두루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긴다. 그래서 이처럼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아주기 바란다” (지제교 박이장(朴而章)이 지어 올렸다).
이어 주온(酒醞)을 베풀고 무명과 베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경주절충장군(折衝將軍) 황희안(黃希安) 등215명, 울산 절충장군 박봉수(朴鳳壽) 등165명이 모두 마당에서 은혜에 감격하여 찬탄하면서 손 모아 축원하였는데, 심지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술이 반쯤 되니 모두 일어나 말하기를,
“처음에 창을 메고 왜적을 칠 때는 조그만 공이라도 세워서 부형의 원수를 갚고 조석으로 연명이나 하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작은 공이 위로 알려져 임금님의 벼슬이 내려졌으니 은혜가 이미 두텁고 분수가 이미 넘었습니다. 만 번 죽다가 살아나서 다시 오늘과 같은 은혜를 입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함께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여 성스러운 교화를 춤추고 노래하며 밤중이 되어서야 잔치를 마쳤다. 옛날에 파수(灞水) 가에서 군사를 위로하고, 산동(山東)에서 북을 울리던 일도 아마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모두 말하기를,
“성대하도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의 군사와 백성들이 보고 느끼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신 한준겸은 직책이 경상도관찰사로서 손잡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그 전말을 서술하고, 이어 연회를 베푼 관료 및 장사의 성명과 관직을 아래에 기록해 둔다. 때는 만력27년 12월 27일이다.
어사봉정대부세자시강원필선지제교 신 윤휘
관찰사가선대부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신 한준겸
겸울산도호부사절충장군수좌도병마절도사 신 곽재우
수경주부윤통정대부경주진병마절제사 신 이시발
절충장군행부호군 신 박봉수
절충장군행부호군 신 박이손
절충장군행부호군 신 김득복
절충장군행부호군 신 황희안
절충장군행부호군 신 박응탁
<자료출처>
「왜란 사적」, 『울산광역시사』(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자료편, 2002. 259~2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