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와의 교섭 경로를 계속 유지하려는 조선은 그가 강하게 요구하는 왕자 송환에 대한 답례서 외에 매를 선물로 더 보내어 가토오 기요마사의 태도를 누그러뜨릴 것을 결정하였다.
사명당(四溟堂)은 이것을 가지고 경주로 내려왔다. 사명당은 지금까지 회담에 대동하였던 울산출신, 주부 이겸수(李謙受)와 직장 장희춘(蔣希春)을 서생포왜성으로 보내어 중도에서 만나 회담하기를 제의하였다. 선조 27년(1594) 12월 23일 사명당은 이겸수(李謙受), 장희춘(蔣希春), 김언복(金彦福) 등을 대동하여 좌병영 동쪽 일본군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나 가토오 기요마사는 회견을 거부하고 승려 니쓰신(日眞)과 부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편지만을 대신 전하게 하였다.
이 서신은 이미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 회담을 하였고, 사명당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통하고 있으면서 이제 다시 강화를 청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을 배신 행위로 힐책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명당이 되풀이하여 변명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납득하지 않았다.
부득이 경상좌병사 군관 북부주부(北部主簿) 이겸수(李謙受)에게 왕자의 서신, 매와 표범 가죽 등의 선물을 주어서 가토오 기요마사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겸수 일행이 서생포왜성까지 갔으나 가토오 기요마사를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다. 다만 순화군(順和君)과 사신 2,3명을 보내주면 간파쿠(關白)에게 데리고 가서 화의를 일시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토오 기요마사의 회답을 받아 돌아왔다.
선조 28년(1593) 3월 3일 사명당을 빼고 한번 더, 명(明) 사신과 가토오 기요마사 사이에 서생포왜성에서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오 기요마사가 강화 교섭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교섭이 진전되지 않는다. 명측에서도 가토오 기요마사에게 방해하지 않도록 깨우쳐주었으면 한다.”고 요동의 경략 손광(孫鑛)에게 요청하여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토오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기만적인 강화 조건을 비난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잔꾀를 부려 양국을 속이고 있음을 격하게 힐난하였다. 그리고 명 사신에게 앞의 5개 조건을 제시해서 승복할 것을 다그치면서 명과 조선은 결국 일본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격한 말까지 나왔다. 이에 명 사신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얼굴빛이 변한 채 분연히 일어나고 말았다. 이로써 이 회담은 별 성과없이 끝났으며, 명 사신은 요동으로 귀환하는 도중 서울에 들러 “가토오 기요마사는 4도 할양을 얻지 않는 한 절대 철퇴하지 않는다.”고 전하였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라는 교섭 체결이 지연되는 것은 가토오 기요마사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참언하였고, 이로 인해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를 교섭의 방해자로 판단하여 1596년 4월 귀환 명령을 내리고 근신케 하였다. 이에 조선의 강화교섭 경로는 단절되고, 가토오 기요마사도 강화활동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출처>
우인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생포왜성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9. 121~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