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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節十員 |
折衝將軍- 張吾石, |
生節二十八員 |
副正- 金洽, |
晩到義勇十五員 |
有司章甫- 朴武公, 張長春, 朴應良, 金錄守, |
기 타 |
校正- 將軍 片彪, |
그 후, 세월의 흐름속에 창표당 건물은 자연적으로 허물어져 주변은 황량하게 잡초가 무성하게 방치되어왔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울산 지역민들과 공신의 후예들에 의해 창표당은 중건되었다. 창표당의 중건이 이루어진 것은 1906년경이었다. 이는 창표당이 처음 만들어지고 약 300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중건된 창표당의 배치 구조와 규모는
서생포성안에 와가 4간, 사당 2평, 숙소 3칸으로 건립하였으며 비석 1기가 남아있다.(문화유적총람, 1977)
와가 4간은 창표당을 가리키고, 사당 2평은 창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창표당과 창표사 건물은 1938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제의 의해 훼철된 것으로 짐작된다.
<자료참조> ‘울산임란사’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 -우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