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四溟堂)은 서생포왜성에서 전후 3차례에 걸쳐 대표적인 적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와 외교담판을 통해 실로 다양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명나라 측에서 보면 별 소득 없는 실패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로서는 많은 성과를 거둔 유익한 회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 교섭의 내용, 특히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을 조건으로 추진되고 있던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 교섭의 내용을 탐지하여 조정에 알리고, 스스로도 가토오 기요마사의 그 같은 요구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둘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고니시 유키나(小西行長)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적진을 분열시킴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쟁 추이 면에서도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데 공헌하였다.
셋째, 가토오 기요마사와 외교담판 기회를 적정 정탐의 호기로 활용함으로써 왜군의 성의 구조, 군기, 군수물자 등을 두루 살펴 군사전술 및 전략상의 대책 마련에 크게 기여하였다.
넷째, 일본군의 군사 재개에 대비한 군사적 방비책 마련에 진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일간의 참된 강화 곧 영토 할양이나 왕자의 인질을 전제로 하지 않는 화평 교섭을 통하여 평화를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상과 같이 사명당(四溟堂)은 가토오 기요마사와(加藤清正)의 외교 교섭을 통해 조선의 생존에 유익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가토오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적진을 분열시킴으로써 조선 영토의 일본에의 할양과 조선의 일본에의 복속을 전제로 추진되고 있던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교섭을 저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적정을 탐지 한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일본군에 대한 총공세를 펴기 전에 사명당과 울산의병 장희춘(蔣希春)을 특별히 지목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다시한번 가토오 기요마사의 서생포왜성으로 파견하여 적정을 탐지하는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적극 거론한 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위낙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지는 못하였다.
후일 사명대사는 임난이 끝난 후에도 대마도에 파견된 기회를 이용하여 직접 일본 본토에까지 건너가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회견을 하고, 7년여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을 풀고, 신의와 평등에 기초한 국교정상화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그 과정에서 3,000명에 가까운 포로 송환을 주선하는 공을 세웠다.
아울러 사명당의 서생포왜성에서의 외교 교섭에 참여한 울산인물로 경상방어사 군관주부 김언복(金彦福), 경상좌병사 군관 북부주부 이겸수(李謙受), 울산군수의 군관 장희춘(蔣希春)등 많은 인사들이 시종 몸을 아끼지 않고 사명당을 도와 수차례에 걸친 외교 교섭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음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우인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생포왜성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9. 124~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