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진포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1번대는 이튼날 부산진성을, 이어 다대포성을 공략하여 점령하였으며 4월 15일에는 동래성에 진입하였다.
당시 진주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던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 수(金晬)는 일본군 침공 소식을 접수하고 곧바로 경상도 지역 군사의 최초 동원을 명령하였다.
울산을 방비하던 경상좌병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이각(李珏)도 급히 좌병영의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들어와 있었으며,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와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 등이 이끄는 군사들도 이미 집결해 있었다. 또한 밀양부사 박진(朴晉)과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등도 군사들을 인솔하여 동래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울산의 좌병영을 중심으로 13읍의 군사들이 집결하는 등 조선군의 초기 대응은 일단 작동되었지만, 전력의 현격한 격차와 좌병사 이각이 도망으로 인해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4월 16일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이탈한 좌수영에 진입하면서, 기장과 양산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밀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 1번대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일본군 2번대는 4월 18일 부산포에 상륙하여 다음날에는 양산을 경유하여 언양에 진입하였다. 이후 이들은 울산의 좌병영을 향해 계속해서 진격하였다. 당시 좌병영의 상황은 좌병사 관할지역내 13읍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동래를 이탈한 적이 있었던 좌병사 이각(李珏)은 또다시 본영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울산에서 경상좌도를 총지휘하는 주장(主將)의 도망으로 혼란에 휩싸인 좌병영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4월 20일에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면서, 경상좌도의 방어체계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이렇듯 맥없이 무너진 조선군을 연이어 격파한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빠르게 북상을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좌수영-기장-양산-밀양-대구-상주-조령-충주로 진격하였고, 2번대의 가토 기요마사는 양산-언양-울산을 거쳐 경주, 영천 방면으로 진공하였다.
임진년 4월 18일에는 일본군 3번대와 4번대가 경상남도 김해에 상륙하며 연이어 후속부대가 속속 상륙, 조선 전체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자료출처>
김진수(육군3사관학교 전쟁사학과 전임강사),「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조선군의 대응양상에 대한 검토」, 『軍史』(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