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인 신라범종(新羅梵鐘)을 빼앗아 자기네 나라의 국보로 지정한다.
1597년 2월 29일 와카사(若狹) 성주(城主), 오오타니 요시타카(大谷吉隆)가 조선의 경주에서 신라범종을 훔쳐가 자기가 살던 와카시 성내에 있는 조규 신사(常宮神社)에 봉납했다. 조규 신사는 지금의 후쿠이 현 쓰루가 시에 있는데, 이 도시는 해안도시로 제2차 대전 때 군수품을 실어나르던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신라범종의 높이는 115.5cm, 구경 66.7cm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연대는 태화(太和) 7년 신라 흥덕왕 7년(833)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범종의 명문 중에는 “심충사지 행도사지 성사(三忠舍知 行道舍知 成士)”라는 글이 있으니, 삼충사지와 행도사지는 신라 관위명이고 제작자는 성박사, 즉 성씨(成氏)인 것으로 사료된다.
이 범종(梵鐘)은 용통(甬筒)이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종의 꼭대기 부분인 용뉴(龍鈕)는 수직으로 향하여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종정(鐘頂)에 붙이고 종신 하단에는 비천상(飛天像)이 피리를 불면서 평화스럽게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종신 상하단에는 같은 크기의 방곽(方廓)을 구획하여 그 내부에 파도무늬를 조밀하게 새겨 두른 해파문(海波文)이 장식되어 있다.
이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이 범종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수직으로 힘있게 내려오는 광경이나 또는 비천상이 피리를 불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호국불교사상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신라범종(新羅梵鐘)을 훔쳐간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와 강화조약이 시도될 무렵 일시적으로 왜군이 철수할 때로 보여진다.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군은 군사를 증원시켜 재침략을 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오오타니 요시타카(大谷吉隆는 와카사(若狹) 성내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정식을 올리면서 신라범종을 타종하며 승전가를 외쳤다고 한다.
한편, 일본정부는 1900년에 빼앗아 온 신라범종을 자기네 나라의 국보 1등급으로 지정한다. 메이지천황은 어린 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이 신라범종을 참배함으로써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 선조들이 제작한 범종(梵鐘)은 인간의 번뇌를 씻어주는 마음의 고향이며 원천이자 조상의 슬기로운 주조기술과 선조들의 얼이 담긴 것이다. 그 신라범종이 이국땅에, 그것도 임진왜란 때 일본 왜장들이 빼앗아가 일본국보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어찌 가슴아픈 일이 아니리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범종은 모두 6개뿐이다. 그 중 5개가 모두 일본에 있으니 나머지 4개도 어서 찾아서 이 신라범종과 함께 반환될 수 있도록 운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에밀레종만 유일하게 경주를 지키며 에밀레의 애틋한 마을을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자료출처>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