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四溟堂)과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 간의 회담이 선조 27년(1594) 4월 13일 서생포 왜성(西生浦倭城)에서 열렸다. 사명당은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요청에 따라 가토오 기요마사와 외교적 강화 교섭을 하기 위해 그의 본거지였던 서생포왜성을 방문하였다.
사명당에게 이 중책이 맡겨진 것은 그가 ‘충렬위국(忠烈爲國)’의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데다가 승려라는 신분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명당은 일본으로서도 쉽게 신뢰할 수 있을 존재였다. 일본 측의 경우 진영 내부의 적지 않은 참모나 장수들이 승려이거나 불교도였다. 더구나 가토오 기요마사 등 일본군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한자를 알지 못하였고, 약간의 한자를 알고 있는 자는 승려로서 오고가는 서찰의 번역과 초안은 모두 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같은 불제자인 사명당으로서는 이들과의 의사소통이 남보다 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사명당의 일행은 통역관 김언복(金彦福) 등 약 20여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울산 출신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경상좌병사의 군관이었던 이겸수(李謙受)는 길 안내의 역할을 맡았다.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당을 맞이한 가토오 기요마사는 먼저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사이에 추진되고 있던 강화교섭이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해 묻자, 사명당은 이 교섭은 받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자 가토오 기요마사는 교섭의 창구로 자신을 택한 명 제독 유정과 사명당에게 호감을 표하고 앞으로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다음날 가토오 기요마사는 강화의 조건으로 5개항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사명당의 생각을 물었다. 이 5개항은 가토오 기요마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령한 것이었는데, 5개 조항과 그에 대한 사명당의 답변을 간략히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았다.
① 명나라 황제의 딸을 시집보낼 것,
= "명나라 황제가 천하에 통치하고 있는데 어찌 귀한 딸을 만리 창파 밖에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불가하다."
② 조선의 4개 도(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 "일본이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침범하고 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림이 극에 달하였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영토를 할양해줄 수 있겠는가?"
③ 전과 같이 교린할 것,
= "군부의 원수를 잊고 형제의 친교를 맺는 것은 불가하다."
④ 조선의 왕자 1명을 일본에 입송하여 영주케 할 것,
= "일본이 이유도 없이 침범하여 종사를 도탄에 빠뜨려 원한이 뼈에 사무치는데, 어찌 귀한 왕자를 이국 땅에서 살게 할 수 있겠는가?"
⑤ 조선의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 "이 역시 같은 이류로 불가하다."
이상과 같이 5개 조항은 모두 대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결코 들어주지 않을 것이며, 이를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한다면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강화 회담이 결코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별도로 가토오 기요마사 본인이 제독 유정과 화의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가토오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추진하는 화의가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분석에는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함경도에서 포로로 잡은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를 방환한 뒤에 아무런 감사의 표시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제1차 회담은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유정의 귀환후 보고에 의해 가토오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알고, 그 이간책을 추진하기 위해 이겸수를 다시 가토오 기요마사가 있는 서생포왜성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가토오 기요마사는 앞의 두 왕자의 소식이 없는 것에 대해 엄하게 힐문하였다.
<자료출처>
우인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생포왜성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9. 116~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