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7년(1594) 7월 12일 사명당(四溟堂)과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회담이 다시 서생포에서 열렸다. 사명당은 통역관 김언복(金彦福)을 포함 수십명을 동반하여 서생포왜성을 찾았다. 이 때 동반한 울산지역 인사로는 울산군수의 군관인 장희춘(蔣希春), 북부주부 이겸수(李謙受), 통역관 김언복(金彦福) 등이 대표적이었다.
가토오 기요마사와 마주한 사명당은 가지고 온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서신을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개 일본이 빨리 철퇴하지 않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려는 것을 책망하고, 만약 지금대로라면 수군 100만으로 귀로를 차단하여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었다.
이에 가토오 기요마사는 붓을 들어 일문으로 쓴 것을 일본 승려 니쓰신(日眞)으로 하여금 한문으로 고쳐 써서 보여주게 하였다. 그내용은 1차 회담에서 일본측에게 제기하였던 5개 조항의 진척 상황을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2개 조항을 더 첨가하여 요구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시집보낼 것,
2, 조선의 4개 도(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
3, 전과 같이 교린할 것,
4, 조선의 왕자 1명을 일본에 입송하여 영주케 할 것,
5, 조선의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6. 명나라도 인질을 들여보낼 것
7, 명나라는 누구를 일본에 파견할 것인가?
사명당은 앞의 5개 조항에 대해서는 전일에 이미 분명히 답변을 한 바 있고, 이번에 또 유제독의 서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으며, 아래의 새로운 2개 조항은 중국과 관련된 것이어서 논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답변하였다. 그러자 가토오 기요마사는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유제독이 화의를 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하였다. 사명당은 유제독의 뜻은 가토오 기요마사 당신을 일본의 간파쿠(關白:천황을 대신하여 칙령을 내릴 수 있는 관직)로 봉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반응을 살폈다.
가토오 기요마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5개 조항은 간파쿠의 명령이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사명당은 아무리 간파쿠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명나라의 뜻에 합당하지 않고 또한 의리에도 맞지 않아 이 화의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가토오 기묘마사는 이 5개 조항이 시행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강화라고 할 수 있겠는냐고 반문하였다. 사명당은 5개 조항 가운데 교린 한 조항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여운을 남겼다.
가토오 기요마사는 화제를 돌려 명나라와 조선의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3가지로 지적하였다.
첫째 전날 함경도 안변에서 명나라 사신이 화의를 구하러 왔다가 간 후 아무런 소식이 없는 점,
둘째 심유경이 화의로써 스스로 맹세하고 나로 하여금 퇴각하여 내려오게 한 뒤에 아직까지 아무런 결정이 없는 점,
셋째 포로로 잡은 두 왕자를 송환하였음에도 아직까지 아무런 고마움의 표시가 없는 점 등이었다.
이에 사명당(四溟堂)은 다시 3차 회담을 가질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사명당은 강화 7개항이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의향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제안한 것이며, 가토오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 실현의 충실한 실행자임을 알았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자료출처>
우인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생포왜성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9. 119~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