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
임진년(1592) 4월 13일 오후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 1번대(一番隊)의 주장 고니시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약 2만의 병력으로 부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성을 지키던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수백 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동래성전투
부산진을 함락시킨 고니시는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동래성으로 향하였다. 급보에 접한 좌병사 이각(李珏)이 울산 본영으로부터 달려왔다. 그러나 적세가 대단한 것을 알고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에게 원병을 구해온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송상현은 수백 명도 안되는 군사를 이끌고 끝까지 싸우다가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조방장 홍윤관(洪允寬), 군관 송봉수(宋鳳壽) 등과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밀양부근 전투
17일 새벽부터 진격을 개시한 고니시의 주력은 양산성에 무혈입성하고(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 전투에서 이미 전사) 18일에는 밀양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당시 경상감사 김수(金粹)는 진주성에 와 있다가 급보를 듣고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들에게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밀양성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이곳도 비슷하여 수령들은 도망가기에 급급 하였다.
오직 밀양부사 박진(朴晋)만이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다가 도저히 당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군기(軍器)와 군량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했다. 왜적들은 역시 무혈입성하였다. 그러나 박진은 분전한 공로와 적에게 군량미와 군기를 남기지 않은 공적을 인정받아 후에 경상좌병사로 기용되었다.
울산함락
왜군의 1번대 주장 고니시가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공격할 때 2번대 주장인 가또오는 다대포와 서생포를 공격, 함락시켰다. 왜군들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쌓은 실전 경험과 숙달된 조총부대, 잘 짜여진 기마대, 창검대, 궁수대 등을 정비하여 대병력으로 돌진해 왔다.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군기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각 병영이나 수영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군 상륙부대의 침공 초기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들의 주 공격로가 경상좌도이었기 때문에 경상좌도의 병영이나 수영은 어느 한곳 온전한 데가 없었다.
특히 가또오군의 공격을 받은 서생포, 다대포, 염포의 만호영과 울산의 경상좌병사 본영 및 언양, 경주성이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모두 붕괴됐다. 울산은 경상좌병사의 본영이 있던 곳이었으나 좌병사 이각이 동래까지 갔다가 적의 위세를 보고 도망쳐 버렸다. 또 왜군의 2번대 주장인 가또오가 일찌감치 서생포를 점령하고 북진하는 상황이었다. 울산이 이렇듯 공성허읍인 상태에 놓여져 왜군들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무혈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공방전
가또오는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4월 19일에 언양, 4월 21일에는 경주에 쳐들어 왔다. 이 때 경주에는 신임 부윤(府尹) 변응성(邊應星)이 아직 부임하기 전이어서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장수현감 이수일(李守一)과 더불어 수백 명의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성밖에 나타난 왜군의 군세에 압도당하여 그냥 도주하고 말았다. 이를 제1차 경주성전투라 한다. 경주판관 박의장의 퇴각도 역시 그 불가피함이 인정되어 후일 경주부윤으로 임용 되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인 8월 20일에 경상좌병사 박진은 경주판관 박의장, 의병장 정세아(鄭世雅) 및 전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를 군관으로 삼아 총병력 1만여 명으로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언양 방면에서 왜의 대병력이 구원병으로 달려와 협공을 하자 전사자 600여 명을 남기고 안강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를 제2차 경주성전투라 한다.
제2차 경주성전투에서 패하여 안강에 본진을 설치하고 주둔하고 있던 박진은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으로 하여금 신병기를 개발하게 하였다. 오늘날 수류탄 비슷한 포탄을 대포에 넣고 발사하면 5∼6백보를 날아가서 터지는 것이었다. 이를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 명명하고, 공격준비를 더욱 치밀하게 한 후 9월 8일에 다시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왜군들은 처음에 진천뢰가 날아와 떨어지자 무엇인지 몰라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한꺼번에 수십여 명이 폭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혼비백산한 왜적들이 서생포 방면으로 퇴각하니 드디어 전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이정일(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임진 정유왜란과 울산」, 『울산광역시사』(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역사편, 2002. 515~519쪽(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