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무모한 야망은 군졸 26만 2천명, 수군 9천명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1진이 부산, 울산 등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전후 9진으로 나누어 조선을 침공하여 왔다.
이 때 울산의 병영성에 본진을 가졌던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左衛將)으로 하여 휘하의 군병 1천여명과 관리 2백여명을 이끌고 4월 14일 동래성으로 달려갔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 소산역(蘇山驛 -동래부근)으로 도망쳐 버렸다.
경주판관 박진(朴晋)은 부산성이 이미 적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급히 군사를 모아 동래방면으로 내려가는 도중 동래성이 또한 함락됨을 알고 때마침 소산역에 와있던 좌병사 이각(李珏)을 만나서 하는 말이
“소산(蘇山)을 잃으면 영남이 우리 것이 되지 못하오니 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서 적을 막을 것이니 공은 뒤에 있다가 이 사람이 이기면 공은 뒤에서 밀고 나와 협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박진(朴晋)은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게 되자 좌병사 이각(李珏)은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것이 4월 15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달아났던 이각(李珏)은 언양으로 달아나서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과 같이 진을 같이 하고 있다가 다시 도망쳐 울산병영의 본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또 좌수사 박홍(朴泓)도 경주로 달아나서 전세를 조정에 보고 하였다.(이 보고로 조정에서는 왜군의 침략을 처음 알게 되었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돌아온 병영성 본진에는 13개 고을의 군사들이 이미 모여 있었고 안동판관 윤안성(尹安性)은 동문을 지키고 있어서 경계가 매우 삼엄하였다. 전의를 잃은 좌병사 이각은 성을 비워놓고 성밖으로 나가 진을 치려하자 윤안성이 이를 반대하니 이각(李珏)은
“서산에 출전하여 적이 성밑까지 당도하면 성내외가 서로 호응 협공함이 좋으리라 이것이 奇兵之計라 할 것이다.”
하며 그의 첩을 먼저 성밖으로 탈출 시켜놓고 성문을 빠져 나간 뒤에 손으로 태화강쪽을 가르키며 윤안성 등을 바라보고
“너희들은 적의 선봉이 이미 저쪽 벌판에 가득차 있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달아났다.
이 때 병영성의 좌병사(左兵使) 다음으로 임무가 막중한 병마우후(兵馬虞候) 윤응두(尹應斗)도 또한 밖으로 도망치려 하니 윤안성(尹安性)이 소리 높여
"내가 이각을 베지 못한 것을 한하는 바 공 또한 그의 본을 받으려하는 것이오"
하니 감히 달아나지 못하다가 뒤에 또한 도망하고 말았다.
병영성내의 사정이 이렇게 되고보니 장졸들은 모두 다 싸움에 뜻을 잃고 밤사이에 달아나는 자가 늘어나서 모두가 싸우기에 앞서 흩어지고 말았다. 이각(李珏)은 그 해 5월에 임진강변에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 붙잡혀 군률에 따라 주살되고 말았다.
그는 원래 무예가 뛰어났다 하였으며 병영본진에서는 海磨石을 사용하여 탄환과 같이 쏘아내어 성세가 대단하여 사람들이 將材라 하였으나 탐욕이 많고 비겁한 일물이었다.
한편 동래성으로 갔던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은 왜군에 잡히는 포로가 되어 일본군의 강화에 관한 서신을 받아 2일 뒤에 돌아 왔으나 벌 받기를 두려워하여 시체들 속에 숨어 있다가 울산으로 탈출하였다고 허위 보고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병영성이나 울산읍성은 지킬 사람 없는 빈 성(城)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왜군 제 2진이 4월 19일 부산으로 올라와 가등청정(加藤淸正) 등 22,800명의 병력은 언양 경주 영천을 거쳐 신녕(新寧 : 경북 팔공산 부근)방면으로 칩입하여 갔다.
그리하여 1진에 의하여 기장 양산이 4월 17일에 함락되고 2진에 의하여 언양이 19일, 경주가 21일에 실함되고 말았다.
<자료참조>
「병영성과 울산읍성의 동정」, 『울산 임란사』(울산문화원), 1999. 8~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