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후기, 울주구 언양읍 어음상리(於音上里) 마흘부락(馬屹部落)을 요도(蓼島)라 불리웠다. 신라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육조대신(六朝大臣)의 관사(官舍)가 바로 요도(蓼島)였을 것이다. 신라 육조대신이 이곳 요도에 거주하여 신라조정 80리 길을 조신들이 내왕하였던 곳으로 신라 말년에 이르러 재상(宰相) 나 승상(羅丞相)에게 요도(蓼島)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육조대신은 아마 육관을 말하는 것으로 주대(周代) 의 제도인 육경(六卿)과 같은 말이다.
1, 천관(天官), 백관을 통솔하는 최고 행정부인 재상(宰相).
2, 지관(地官), 교육을 맏은 사도(司徒).
3, 춘관(春官), 방례(邦禮)를 관장하는 종백(宗伯).
4, 하관(夏官), 군사의 일을 맏은 사병(司兵).
5, 추관(秋官), 형률 행정(刑律行政)을 맏은 사구(司寇).
6, 동관(冬官), 토지와 인민등을 맏은 사공(司空)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 때의 수도(首都)는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본피부(本彼部)·모량부(牟梁部)·한기부(漢岐部)·습비부(習比部)의 6부 외에 소읍(小邑) 과 전원지역이 포함된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이허한 왕경의 영역은 후대 고려가 경주(慶州)를 설치하였던 것과 대체로 같은 넓이로, 수도의 방위를 목적으로 배치하였던 6기정(六畿停)이 이 지역내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궁성과 관청이 몰려있었던 도시부 이외에는 각부 귀족들이 모여사는 소읍(小邑)이 기내에 있어 신라 왕경은 지금의 월성군(月城郡)과 인근지역이 좀더 포함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1537년 7월의 언양면세일반(彦陽面勢一班)에 수록된 요도(蓼島)에 관한 설화 기록 중 육조신(六朝臣) 거주설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요도는 신라 때의 관사(官舍)가 있었던 곳이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요도(蓼島)는「헌양잡기(窟陽雜記)」에「在縣東一里 普通院下 卽田麓間一小丘也 處三水間故爲名, 定式流配罪人 十二而每人給 朔米三斗 後或倍給貽民弊」라 하였다.
요도(蓼島)는 섬(島)이 아니라 감천(坎川 : 直洞川)과 남천(南川)이 합류하는 이수지간(二水之間)이라 하여 마치 섬처럼 보인다 하여 부른 이름이요, 요도(蓼島)가 적소(謫所 : 죄인이 귀양살이하던 곳)로 정해져 있는데, 적소의 건물이 어디였던가는 그 흔적이 없으나, 지금의 울주구 언양읍 어음상리(於音上里) 마흘부락(馬屹部落)이다.
요도는 고려 우왕 2년(1376)에 정몽주(鄭夢周)선생이 성균 대사성으로 있을 때 이인임(李仁任) 등의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정책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던 곳이며, 고려말 공민왕의 총신으로 우왕이 즉위하자 탄핵된 김홍경과 조선 숙종때 당쟁에 몰려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연좌된 남곡(南谷) 권 해(權瑎 1639~1704)가 유배되어 온 곳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지명」, 『울산지명사』(울산문화원), 1986. 547~5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