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 본관은 순천, 명종 2년 11월27일 합천군 가야에서 승지 양좌(良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재 노수신의 문인으로 선조 6년(1573) 생원이 되고 성균관의 추천으로 참봉이 지냈다. 1586년 친시(親試)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에 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다 진주 등지로 가서 군량을 조달해 오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계청(啓請)으로 종사관(從事官)가 되어 활약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뒤에 이조정량,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정인홍의 배척으로 청송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동지충추관사, 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 제독 마귀가 서생성에 입성하여 창표당(蒼表堂)을 세우고 전공이 많은 울산 경주의사들을 소시영세(昭示永世)하고자 위패를 열위(列位)할 때 공은 <晩到義勇十五員> 중의 일인으로 <直史護軍 - 朴而章>으로 기록되었다.
선조 38년(1605) 행호군(行護軍)으로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성주(星州)에서 후진양성을 하며 여생을 마쳤다.
문장에 능하여 선유기사(宣諭記事)등을 지었고(1599.12) 특히 시에 뛰어났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용담집(龍潭集)』이 있다.
<자료출처>
「임진왜란 제2부」, 『울산의 충의정신』(울산의 충의정신 편찬위원회), 2005. 150쪽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