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울산(蔚山)에서 태어났다. 신광재의 본명은 신용관 호는 광재이다.
서울에서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군사정부인 군정부(軍政府)가 동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소속하는 단체로 개편되면서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주는 기관으로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 각 부서는 독판(督辦) 이상룡, 정무총장 이탁, 내무사장 곽문(郭文),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이 담당하였다.
신광재가 참여한 서로군정서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은 40대의 장년층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지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인물들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조직 이후 출신인사들이 많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치하고,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지역에 40여 간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신광재는 의용군(義勇軍)에 소속되어 의용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의용군은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운영하던 채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후 채찬•장기초(張基礎)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輯安縣)과 통화현(通化縣) 등지에 두었고, 국내진공작전과 친일파 제거 등을 주로 하였다.
신광재는 채찬•이병철(李炳哲)•장창헌(張昌憲)•백설령(白雪岺) 등과 함께 평안도 대안 지역인 관전(寬甸)•집안•통화•임강(臨江)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 5월 중순에는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역에 있는 홍범도(洪範圖)에게 부대를 파견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신광재는 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21년 8월, 그의 나이 31세의 젋은나이로 서거하였다.
한편 [독립신문] 1922년 8월 29일자에는 신광재의 간단한 경력이 소개되었다.
“경남 울산군 신광재(36) 씨는 본국 경성에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서간도 삼원포에서 무예를 학습하여 우리 서로군정서 의용대장이 되어 많은 공헌이 있다가 민국 3년(1922) 8월에 신병으로 작고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 군경과 친일주구들이 그렇게도 공포에 떨었던 의용대장 신광재의 모든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12•1014•101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299•302면
<자료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