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공단비(宋公壇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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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송도 선생(孝子 宋滔先生)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효문초등학교 교문 안쪽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 앞면에는 ‘효자성균생원연안송공단비(孝子成均生員延安宋公壇碑)’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송도 선생의 비(碑)는 당초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북구 효문동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래전 중구 우정동으로 옮겨졌다.
그의 비(碑)가 우정동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조 후기 효문동에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이들이 비각(碑刻)을 우정동으로 옮겼다는 설이 있나 하면 효문동에 비가 선 후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 비를 옮겼다는 애기도 있으나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효문동 주민들을 중심으로 송도 선생의 비가 그의 출생지인 효문동에 있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2006년 이곳에 세웠다.
효자 송도 선생의 본관은 연안(延安)으로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해 생원시(生員試 : 조선 시대, 소과(小科)의 하나. 사서오경을 시험 보던 과목으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가 있었다. )에 합격했다.
부모를 극진히 섬겼던 그는 생원시(生員試)가 되었을 때 어머님이 눈이 멀어 사물을 보지 못했으나 자식이 과거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떴다고 한다.
또 한 때는 중환이었던 어머니가 회를 먹고 싶다는 말을 했으나 집이 가난해 이를 대접 못하자 겨울에 물가에서 얼음을 깨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붕어가 튀어나와 이를 잡아 드렸다고 한다. 또 어느날 제사 때는 제사 음식을 마련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는데 이때도 산꿩이 집으로 날아들어 이를 잡아 제수용품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효도가 지극했던 송도는 부모가 돌아갔을 때 초막을 짓고 6년 동안 시모살이를 했다.
우리나라 신하가 명나라에 조공을 올리기 위해 갔을 때 신종(神宗)이 “조선에서 내세울만한 인물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신하는 “조선에 송도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어찌나 효성이 지극한지 하늘도 감읍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종은 감동을 받아 “중원은 대국으로 왕상(王祥)같은 효자가 있으나 중국에 비하면 조선은 소국이지만 이처럼 훌륭한 효자가 있다고 하니 홍문을 내린다.”고 말했다.
신종은 또 직접 글을 지어 효가 모든 행동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이처럼 송도 선생의 효성이 지극하자 송도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을 효문동(孝門洞)으로 이름 짓고 문중에서 정려각과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후 비와 정려각이 중구 우정동으로 옮겨졌고 1988년에는 정려비가 울산시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처음에는 북구 효문동에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과 비석을 세우고 제를 올리다가 후손들이 그 자리에 효문단(孝門壇)을 세웠다고 한다. 이 후 효문단은 남구 신정동 은월봉 기슭으로 옮겨졌다.
그 후 비석과 비각은 중구 우정삼거리에 있다가 2006년 다시 동헌 內 중부도서관 바로 옆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안송씨 효자공파문회(孝子公派門會) 족보에는 정려비가 본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영조 13년(1737)에 울산도호부 서쪽 강정연못가로 옮겼다고 적고 있다. 직사각형 비석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정려비 앞면에는 ‘효자송도선생정려비(孝子宋滔先生旌閭碑)’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송도 선생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깨어져 일부가 떨어져 나간 작은 비석에는 ‘강희임진팔월(康熙壬辰八月)'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어 학계에서는 정려비가 숙종 38년(1712)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자료출처>
『북구 지명사』(울산광역시 북구문화원), 오름기획, 2011. p488~4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