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춘(李應春)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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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가서 순국한 이응춘(李應春)이 아들 승금(承金)에게 보낸 유서이다.
이응춘의 자는 태영(泰英)이요, 본관은 청안(淸安)이며, 호는 퇴사제(退思濟), 청안군(淸安君) 이양길(李陽吉)의 후손이다.
이응춘은 임진년 5월 29일에 두 아우, 우춘(遇春)·봉춘(逢春)과 아들 승금(承金)을 비롯하여 3백여인의 의병을 이끌고 공암(孔巖-강동면 신명리) 싸움에 참전하였고, 선조 26년2월 6일에는 태화강구 싸움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그는 해상 전투의 중요성을 알고 전함을 만들어 태화강에서 해전에 대비했고 스스로 '능해장(凌海將)'이라 불렀다.
선조 27년(1594) 10월 7일에 진을 개운포(開雲浦)로 옮겼는데 이튿날인 8일에 졸지에 도적의 대군이 나타나서 종일토록 세 차례나 싸워 그 예봉을 꺾었으나 그들은 다시 무수히 달려드니 힘은 다하고 원군은 바라볼길 없는 가운데 지탱하기 어려움을 알자 마지막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을 것을 결심, 조상의 제사를 아들에게 맡기고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위 유서는 1594년(선조 27) 10월 개운포(開雲浦·현 울산 남구 성암동)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기 직전에 아들 이승금(李承金)에게 남긴 것으로 현재 울산박물관 內에 전시 되어 있다.
유서는 사용된 종이나, 서체, 그리고 내용에 이르기 까지 급박한 전황과 죽음을 앞둔 가장의 고뇌를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유서를 쓰는 그날 울산 개운포에서 세 번이나 적과 교전했다. 마침내 대군을 실은 적의 선단이 온산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급히 유서를 썼다.
유서는 한지에 쓰였으며 손바닥 두쪽 크기다. 급히 작성하느라 묵필을 제대로 챙길수 없는 형국을 느끼게 한다. 서체는 초서체다. 빠르게 적어내렸다.
편지내용은 이렇다.
“개운포에서 3합을 싸워 적의 예봉을 꺾었다. 대군이 함선을 타고 들어오니 힘이 부친다. 집안 대대로 나라에 은혜를 입었다. 오늘 죽기로 싸운다. 다 갖추어 전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조상 제사를 거두도록 하라.”
그는 유서를 남긴 그날 개운포에서 전사했다.
전후에 나라에서는 그 공을 높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하고 벼슬은 부장이었으나 선조 때에 병조참판에 추서되었으며 아들 이승금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훈록 되었다.
<자료참조> '울산대학교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