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조대(望潮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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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조대(望潮臺)는 망조당 서인충(徐仁忠)이 젊은시절에 병서와 말타기, 활쏘기 등의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며, 또한 임진전란 7년동안 조수와 기상을 관측하고 작전을 구상한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지(遺跡地)이라 한다.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고, 울산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사를 살펴보면 서인충(徐仁忠) 보다 활약이 많으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서인충은 1554년 9월13일 울산 동구 동부동 남목 서당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위에서 "장차 나라의 큰 일을 할 재목"이라했으며, 젊은 시절 동구 남목에 있는 망조대(望潮臺)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큰 꿈을 꾸었다.
임진년인 1592년 4월 14일, 왜군은 20여 만의 군대를 이끌고 총 15도로 나누어 조선에 침략하는데, 울산은 당시 경상좌병영이 있는 중요한 위치임에도 변변한 전투 한번 없이 점령되고 말았으며, 특히 좌병사 이각(李珏)은 도망치다가 붙잡혀 군율에 의해 참수당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계층의 무력한 모습과는 달리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은 전세를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면 임진,정유왜란 때 망조당(望潮堂)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91년 |
3월 3일 |
박봉수, 윤홍명, 박진남, 전응충, 이경연, 서인충 등을 비롯한 18인이 무룡산에 올라가 시회를 열고 근해 남쪽에서 오는 소식이 매우 염려되는 바이니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나라의 위란에 바치자고 하늘에 맹세 |
1592년 |
4월 14일 |
왜군의 부산포 침입 |
4월 15일 |
염포나 양정의 치전, 장생포, 서생, 방어진 등 해안에 일본군 상륙 |
4월 17일 |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상실 |
4월 21일 |
무룡산 시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장정 20여명을 거느리고 이경연에게 모이니 그 수 삼백인에 이르렀다. |
5월 10일 |
서인충과 재종 서몽호가 거병하여 울산을 수복하고 왜군은 동래로 후퇴 |
6월 5일 |
경주의 문천에 4,200여의 대군을 형성하여 적과 싸워 적의 격살 400여급과 총검 노획 27자루, 이 전투에 서인충과 서몽호 형제 참여 |
9월 |
전만호 김태허를 군수 서리로 임명하여 의병장들의 치하에 있으나 방어의 구심점이 없어 산곡에 피해있던 자들을 소집, 달포도 못되어 3,000여 의병이 조직 서면장 : 전 언양현감 박홍춘, 부산과 동래의 적 방어 남면장 : 전 훈련봉사 전응춘, 양산과 기장의 적 방어 주사장 : 서인충, 공사선(公私船) 수리하여 수로를 방어 군 수 : 전만호 김태허, 300여 병사를 거느리고 3로의 완급한 정보에 따라 수시 지원 |
9월 10일 |
1차 개운포 전투 : 적의 동태를 파악, 기습하여 100여 급을 벰, |
1593년 |
6월 28일 |
이견대의 수군 싸움 : 목벰이 1, 사살이 10, 쏘아 적중 4명 |
10월 1일 |
남면 신야리(온산면 덕신리) 전투에서 적 3급 목벰 |
10월 11일 |
남면 전탄(태화강 하류)에서 접전하여 적의 수급 5급 목벰 |
11월 20일 |
소봉대 밑에서 사살 2, 쏘아 적중 10, 조총탈취 2 |
이와 같이 서인충(徐仁忠)은 울산의 주사(수군)장으로 활약하다가 점차 의병들의 관군화 유도로 1593년 훈련원의 직이 제수되었다가 다대포 첨절제사, 1594년에는 부산포 수군첨절제사 직이 제수되나 당시는 적의 수중이므로 경상좌수사의 휘하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관군으로 편임된 후, 서인충의 활약은 전체 관군의 공으로 흡수되거나 지휘권이 명의 군대에게 있음으로 인해 표면으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단지 1598년 11월 18일에 퇴각하는 왜군을 공격하고 서생포왜성에 입성하여 창표당(蒼表堂)을 세울 때 참여한 사람이 43인 중 훈련원정 서인충(徐仁忠)의 이름이 나와 있어 전란이 끝날 때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1605년 4월 16일에 이르러 왜란 중의 공신들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의주까지 가고 또한 명군을 출동시키는데 힘쓴 호종공신(扈從功臣), 전선에서 수훈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이몽학의 반역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확정하여 그 공을 높이 치하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선무공신은 선무공신(宣武功臣)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구분하였는데 선무원종공신은 9,06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중 울산 출신자는 1599년 경주 포상잔치에 참가한 165명으로 파악되며, 서인충(徐仁忠)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은 부산과 거의 같은 기세로 왜군의 침입을 받은 지역이고 왜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관할 하에 있어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었다. 지금까지의 임란의병사는 경상우도 지역의 활약을 중심으로 살폈다. 즉, 전라도 지역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농업에 젼념하면서 물자와 식량의 공급지가 되어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육지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경상우도 의병의 역할이 막중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경상좌도 울산의 경우에도 많은 의병들이 있었고 이들의 피나는 희생이 왜군의 전체적 위력을 크게 격감시켰다는 점도 또한 사실이다.
관군을 대신하여 지역을 방위한 그들의 충절에 우리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망조당 서인충(徐仁忠)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망조대(望潮臺)를 보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을 지킨 그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자료출처>
「중 북구 지역」, 『다같이 돌자 울산 한바퀴』(울산역사교사모임) 1999. 128~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