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예종 원년(1469) 여름에 가뭄이 심하였나 보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화룡제(畫龍祭)를 행하다
화룡 기우제(畫龍祈雨祭)를 행하였다. 또 동남(童男) 1백 인을 경회루 연못의 남쪽에 모아서 석척 기우(蜥蜴祈雨 - 도마뱀을 병 속에 잡아 넣고 지내던 제사. 도마뱀이 용(龍)과 비슷하기 때문에 용의 응험(應驗)을 빌기 위한 것이었음)를 행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한치의(韓致義) 그리고 울주 언양군(彦陽君) 김관(金瓘)을 행향사(行香使)로 삼아 무릇 3주야를 하였으며, 아닷개(阿多叱介- 호랑이·노루의 털로 만든 깔개) 각기 하나씩을 내려 주었다.
화룡제(畫龍祭)란 용(龍)을 그려 물 속에 넣으면서 지내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의례이다. 이 의례는 언양군(彦陽君) 김관(金瓘)이 행향사(行香使) 역할로서 의례를 집행하였다.
화룡기우의 유래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평왕 50년조에서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이어 1086년(고려 선종 3)에 가뭄이 오래 지속되자 민가에서의 화룡기우가 제안되어 수용되었고, 3년 뒤에도 화룡기우가 설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조에서는 화룡제가 국행기우제로 공식화되어 의례 행향사(行香使)가 정 2품 이상의 고관대작 맡아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근대에 접어들어서 화룡제는 지방 기우제로서 성행되었다고 한다.
우리 울산 지역에서는 시장 터에 토룡을 만들고 화룡을 걸어 놓고는 사나흘 동안 무당이 비를 빌고, 용에 물을 뿌리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화룡제는 회화적 양식을 통해 용을 현존시키고 거기에 기원과 주술적 행위를 가하는 유서 깊은 의례인 것이다.
<자료출처>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