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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명 |
설 치 연 도 |
군 선 |
병 력 |
비 고 |
염포만호진 |
태종 17년(1417) |
11 |
502 |
- 세종 8년 죄도 도만호진으로 승격 |
개운포만호진 |
태종 11년(1411) 11월 |
12 |
420 |
- 세종 5년 좌수영을 이설해 옴 |
장생포만호진 |
태종 7년(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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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포만호를 겸직했음 |
서생포만호진 |
태종 7년(1407) 7월 |
20 |
167 |
- 임진왜란 후 동첨절제사로 승격 |
3) 염포만호진의 설치
염포에 수군만호를 두게 된 것은 태종 17년(1417) 10월부터였다. 경상좌도 수군 도절제사 권만(權蔓)이 왜선이 염포에 잇따라 와서 정박할 뿐만 아니라, 순풍을 만나면 조석에 왕복,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으니 만호를 차하(差下)하여 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병조에서 헤아려 의논하였더니 염포야말로 바다를 지키는 요긴한 곳이라 하여 만호를 두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염포만호진의 군선 수는 대맹선(大猛船 1, 중맹선(中猛船) 4, 소맹선(小猛船) 5,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1 등 도합 1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경국대전』권4, 병전. 대맹선은 전선(戰船), 중맹선은 방선(防船), 소맹선은 병선(兵船)으로 활약했으나, 맹선은 속도가 느려 전투함으로서의 기동성이 없었기 때문에 후일 판옥선(板屋船) 등으로 대체되었다.
세종 8년 4월에는 염포에 도만호를 설치하고 서생포 병선 10척 중에서 3척을 옮겨 오게 하여 그 방어능력을 강화하였다.
성종조에 들어와서는 각 포의 방어망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성보의 축조에 힘을 쏟았다. 종래까지 각 포의 수군은 선상(船上)을 성보를 삼아, 석 달분의 양식과 군기를 싣고 해상에서 근무케 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15년(1484) 10월에 이르러 수군 장졸의 막사와 군기, 군수품 등이 갑자기 약탈 당하거나 불 탈 것이 두려워 전라도와 경상도 연변에 성보를 쌓는 일을 논의 하였다.
이때의 논의에서 “지난번에 제포, 부산포, 염포의 만호가 곳곳마다 담을 쌓아 변을 방비케 하였는데, 이는 왜인과 더불어 같이 있으므로 불의의 변이 발생할까 두려워한 때문에 건의해 쌓은 것이고, 다른 포는 이와 비할 것이 아니니, 보를 쌓는 의논은 옳지 않다”고『성종실록』권171, 15년 10월 계미 하였으니 우리는 이를 통해 염포에는 이미 어떤 형태로든지 축장(築墻)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어 성종 16년에는 여러 포에 보가 설치되었다.『성종실록』권176, 16년 3월 병오, 4도순찰사 홍응(洪應)의 서계. 그 후 성종 21년 6월에 염포에도 높이 15척(尺 ), 둘레 1,039척의 석성을 완성하여 연해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염포성의 위치는 성내 마을과 중리 마을의 경계에서 시발하여 뒤편 산복을 따라 고려화학(주) 공장을 관통, 해안을 쫓아 축조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중리의 바닷가 집들의 담장에서 그 유적을 찾아볼 수있었지만 지금은 공단이 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조선은 왜구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일본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교린책을 강구하여 태종 7년(1407) 웅천의 제포(薺浦),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 세종 8년(1426)에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왜인의 교통, 거류, 교역의 처소로 삼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삼포에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거주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지만 삼포왜란 당시 염포에는 120명 정도가 상주하고 있었다. 중종 5년(1510) 4월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부산 첨사 이우중을 살해하고, 제포를 공격하여 첨사 김세균을 납치한 뒤 웅천을 점령하는 등 분탕질을 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나, 다행히 염포는 왜인의 수가 다른 포보다 적었으므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왜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후환이 두려워 스스로 물러감에 따라 왜란이 폐쇄되어 마침내 통교가 끊기고 말았다.
염포영이 폐지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조 10년(1786)에 만들어진 『울산읍지』의 관방조에는 그 당시 이미 만호진이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잇으니 염포영은 일찍이 폐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동구 역사」, 『울산동구지』(울산동구지 편찬위원회), 1999. 162~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