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는 우산을 쓰고
나는 지렁이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꽥꽥거리는 오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흙을 뚫고 나오지 못한 씨앗의 아픔을 전하기 위해 나는 지렁이가 구둣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잠든 밤에야 퇴근하고 돌아오는 옆집 아저씨처럼 뚜벅뚜벅,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씨앗들의 슬픔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는 꾸불꾸불 온몸으로 편지를 썼지만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눈물겨운 그 마음을 모두에게 거절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나는 울먹울먹 지렁이가 할 수 없이 개미들을 불러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씨앗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개미들에게 온몸을 바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렁이가 하늘에 잠자리들의 길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깜깜한 땅속에 웅크린 씨앗들의 말을 여의주처럼 물고, 지렁이는 나비들의 꿈속에도 잠시 들렀다 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징그럽다며 얼굴을 찌푸리겠지만 나는 지렁이에게 우산을 빌려 줍니다. 저만치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지렁이가 보입니다.
노란 우산이 참 잘 어울립니다.
눈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발은 없는데 발자국을 가졌지요.
내 발자국도 내 동생 발자국도 옆집 민구 발자국까지
제가 벗어 놓은 신발인 양 앞에 놓고 우두커니 서 있지요.
그러니까 눈사람은 발이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엄마도 아빠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르지요.
하느님도 모르지요. 봄이 올 때까지,
눈사람도 눈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지요.
책상 위의 개구리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기로 한 날
밤새 울었다
물 밖으로 두 눈을 내놓고
개굴개굴 밤새워 우는
개구리처럼,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었다
책상 위의 손거울이 무논 같다
무덤처럼 볼록 솟은
개구리 두 눈 속에 엄마 아빠가
다 들어가 있다
—동시집『엄마의 법칙』(2014. 7)에서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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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동시집『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별에 다녀왔습니다』『엄마의 법칙』,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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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동시문학상, 그 의미 깊은 두 번째 성취_ 김륭 『엄마의 법칙』
제2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의 대상은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등을 통해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도 인상 깊은 동시 세계를 펼쳐 온 시인 김륭에게로 돌아갔다. 수상작 『엄마의 법칙』에서는 한층 무르익은 시인 특유의 기발한 상상은 물론, 공감을 기반으로 그린 여러 존재의 내면들이 자연스럽게 깃들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사위원 권오삼은 동화적 서사가 있는 작품, 일상을 동심적인 익살로 풀어낸 작품, 대상을 개성적인 관점으로 표현한 작품 등 시적 묘사의 범주가 넓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고, 이재복은 날개를 단 듯 여기 현실의 세계와 저기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적 형식에 주목했다. 안도현은 수상작을 두고 “앞으로 우리 동시가 나아가야 할 어떤 지점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반가웠다.”는 뜻 깊은 소감을 밝혔다.
첫댓글 동시에서 주목되오던 문학적 상상력, 그 층위의 스펙트럼이 펼치는 놀라운 공간확대.
그 조화의 근원이 어디일까 궁금케 하는 기발한 동화적 발상의 마법 등등~
동시는 시시각각 체질을 바꾸고 있음을 지각해야 하리~~~
시를 다룰 줄 알아야 새로운 동시가 나온다.(동촌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