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9.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29)
요한복음 7장 1~10절
아직, 그러나 곧
■ 낚시를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때까지 몇 시간씩 혹은 한나절, 때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입질이 시작됐을 때 나꿔챌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을 못하거나 놓치면 긴 기다림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낚시를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합니다. 기다림의 미학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림의 미학’의 최고수이십니다. ‘때’를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실 때도 ‘때가 찼을 때’ 오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오늘 본문에서도 ‘때’를 맞춰 일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슬픕니다.
■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한 마디가 일대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이다. 내 살과 피를 먹어야 너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해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다수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 파장은 예수님의 생명을 더욱 위협하는 파장이 되었습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살해리스트 1번에 올라있으셨습니다. 이유는 요한복음 5장 18절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안식일을 범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이다. 내 살과 피를 먹어야 너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으로 파장까지 일으키셨고, 따르던 사람들조차 다수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예수님을 죽이려는 명분은 한층 더 분명해진 것입니다. 더 확실한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생채기를 더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의 비판적인 태도였습니다. 2~5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래도 끝까지 믿어줘야 할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상식선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이다. 내 살과 피를 먹어야 너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습니다. 형제들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보인 태도는 형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었고, 시비 또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밥이시고, 생명의 밥이시라면 은밀하게 활동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자신을 알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이 공개적으로 다니시지 않는 이유를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안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안 된 이유 중 하나가 7절이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어떤 이유였습니까? 세상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악을 폭로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은밀한 죄를 들춰내시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불치병 환자를 낫게 해주신 일들에는 관심도 보이고 기억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숨기고 있는 혹은 꾸미고 있는 악을 폭로하신 일들에는 관심도 없고 기억도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먹고 배부르기 때문입니다. 6장 26절을 기억하시나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물론 내 물질적 형편에 물질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내 병든 육체에 치유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한 삶이 여유 있는 삶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픈 분이 건강해지면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전적으로 소유를 위해 살고, 전적으로 육체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형식적인 관심만 보이고, 속은 육체와 물질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의 욕망과 가식(假飾)을 배려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프더라도 이를 지적하시고 호되게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적하시는 말씀은 사랑입니다.
■ 예수님은 두려워서 자신을 감추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 지상에서 행하시고 마무리하셔야할 일이 남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8절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아직 자신을 전적으로 드러내시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7절의 이유는 부수적인 것이었고, 8절의 이유가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때가 차야 역사(役事, work)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늘 주관하십니다. 언제든지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歷史, history)를 주관하시는 방법은 때가 찼을 때 역사(役事)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입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소위 하나님께 시험 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나를 위해 언제 일하시겠다는 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하시는 거야?’라며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다 소위 눈이 빠진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다림의 고통을 즐기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 빼지 마시고 진작해주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진 빼자고 이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실까요? 때가 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법칙/원칙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시간은 상황이 차야 됩니다. 이것이 오히려 완벽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채우신 시간은 기다린 보람을 누리게 하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다리느라 지치고 상한 영혼에 충분한 위로가 될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면 안 될까요?
■ 우리의 신앙의 인생에 있어 하나님께서 ‘아직’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망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에 대해 원망스러우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찌 자식의 속상함이 남의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큰 것을 알고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은 소망이라는 기다림의 미학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애쓰셨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다. 곧 하나님의 때가 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