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6.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0)
요한복음 7장 10~24절
무엇이 정말로 옳은지를 따지라!
■ 우리의 정서는 따지고 드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수그러들거나 넘어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가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은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들 때문에 발전하기도 합니다.
‘왜?’라는 질문은 꼬치꼬치 따지는 것의 대표적인 질문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했기 때문에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이거나 퇴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라는 질문은 비난받거나 회피되어서는 안 됩니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자리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왜?’라는 질문에 더욱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입니다. 24절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는 “판단”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판단이란, 무엇입니까? ‘따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정말로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옳고 그름을 따져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올바른 따름이 무엇인지를 따질 때 신앙은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건강한 신앙을 위해 따지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직 내 때가 안 됐다며 자신을 공개석상에 드러내는 일을 자제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예수님은 비난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라면서 뭐가 두려워 은밀하게 행동하시냐고 핀잔을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다.”며 이런 면박을 견디셨습니다.
그러나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지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일,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바다 위를 걸으신 일 등은 하나님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드러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아직 차지 아니하였으므로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으신 것입니다.
형제들이 명절을 맞아 성전에 올라간 뒤에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고 은밀히 성전으로 가신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예수님에 대한 입방아도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1~13절입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수군거림’은 입방아에 오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드러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입방아를 은밀하게 찧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입방아가 찧어지는 이유는 예수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유대사회의 금기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이 발각되면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은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은밀한 입방아에 예수님은 어떻게 오르내리셨을까요?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와 사기꾼이라는 평가를 번갈아 받으셨습니다. 이 평가는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따져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의 진위(眞僞)가 무엇인지 등을 따져본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혹시 따져는 보셨습니까?
■ 예수님은 자신을 사기꾼으로 결론을 낸 사람들의 입방아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을 곧 하셨습니다.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을 빈정대고 있던 사람들을 당황시킨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글을 배우지 아니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학력조회를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과 가까이서 지낸 동네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슨 설명을 하신 것입니까? ‘내 말의 진실여부는 여러분이 따져보면 당장 알 수가 있다.’라는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율법 준수여부를 꺼내 드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것은 엄청 큰 시비를 거신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나를 죽이려느냐고 시비를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이 시비에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20절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집단 반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이 없어서 이런 반발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은 살해리스트 1번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시치미 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황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당혹감이 식기 전에 결정적인 증거를 내 놓으셨습니다. 21~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이 지적하신 한 가지 일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이 일을 두고 이상히 여기는 것을 이상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안식일에도 행하면서,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해준 안식일은 왜 이상하게 여기고 분노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할례는 중요하고,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해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냐는 지적을 담고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24절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이제 트집 좀 그만 잡고, 여러분의 머리와 가슴으로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고, 정말로 무엇이 옳은지를 따져 보라고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 ‘순수함’과 ‘순진함’은 같은 듯 하지만 다릅니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이 순수함이지만, 순진함은 무엇이 섞여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순수함은 사사롭고 못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착한 것이지만, 순진함은 어떤 판단도 없이 착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이지, ‘순진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지기’와 ‘시비 걸기’는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따지기는 문제를 풀려는데 목적을 두지만, 시비 걸기의 결과는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듭니다. 얼었던 땅이 봄을 맞이해 풀리듯 따지기는 의문과 문제를 풀기 위해 수고하는 조금은 거친 행위입니다. 그러나 시비 걸기는 녹으려고 하는 땅을 다시 얼려버리는 2월의 마지막 겨울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따지기’를 통해 성장하지, ‘시비 걸기’를 통해서는 오히려 퇴보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문하신 것은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주문이십니다. 공의(公義)는 공정한 도의로써, 선악을 공평하게 제재(制裁)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을 일컫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주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엇이 선악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살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만들라는 주문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으로서 촛불을 들어야하는 이유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전통이라는 프레임에 신앙을 가두고는, 순수함을 강요하는 시비 걸기에 몰두하는 세력이 너무 큽니다. 무엇이 정말로 옳은지를 따지는 일은 불허되고, 오직 따지지 말라는 시비 걸기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이 이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분노도 안 생기고 슬프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판단에서 가장 크게 실수하는 것이 외모로 하는 판단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가 점잖다고 그의 속도 점잖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모는 외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눈과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신앙의 성장을 도모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개인의 신앙 성장에 국한하지 말고 세상의 변화에 적극 나서는 ‘사회적 행동’도 서슴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