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0.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5)
요한복음 9장 1~12절
무엇이 중할까?
■ 여러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와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그렇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필요하고, 모두가 중요합니다. 단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있지만 모두가 필요한 것들이고, 모두가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하고,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이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 궁금증들에 답을 내 줄 것입니다.
■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2절) 이 질문은 당시 심각한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개인이 앓고 있는 질병이 자신의 죄냐, 부모의 죄냐를 따지는 것이 당시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외였습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새번역)
모두가 죄에 초점을 맞춰 이 사람의 문제를 들여다봤습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일까,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픔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 교리가 내 놓은 답이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이를 해체시킨 대답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읽을 때 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해체 작업’입니다. 굳어진 교리, 화석화된 신앙과 신학에 대해 가차 없는 해체 작업을 하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순수함으로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교리, 그리고 신앙과 신학은 모두가 ‘예수님의 해체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과 피조물을 살리지 않는 것은 모두가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체는 평화와 정의, 화해와 사랑을 위한 해체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보내지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에 집중하셨습니다. 4~5절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일에 집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제자들의 눈앞에서 당장 보여주셨습니다. 6~7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소명과 사명에 기댄 실천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신앙고백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내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되지 않는 신앙은 단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는 것”(4절)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6절과 7절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이셨습니다. 어둠에 갇혀 지내는 그 사람에게 빛을 넣어주셨습니다.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 When he had washed off the mud, he could see.) 예수님은 말로만 한 몫 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반드시 행동하셨습니다. 반드시 사명을 실천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 I am the light for the world.)
■ 죄 때문에 든 병이라면 절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이 당시의 고정 관념이었습니다. 신학의 교리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죄든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었기에 눈을 뜨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눈을 뜬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 분위기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8~10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당황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결정적인 당혹감은 이 질문입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그들이 신봉하는 교리에 의하면 절대 떠져서는 안 되는 눈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영원히 눈이 감겨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떠진 것입니다. 그들의 교리가 틀린 것입니다. 그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상상이 되시죠?
교리와 신학에 화석화 되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은 나락을 걷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전부가 상황이거나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의 옷을 입은 신학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맞는 옷으로 새 단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상황적이고, 신앙은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적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신앙이 박제화/화석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박제화/화석화된 신앙과 신학을 해체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박제화 된 교리를 갖고 있던 이들의 질문,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절)에 눈이 떠진 이 사람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11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우리는 이 사람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When I did, I could see.)
우리는 이 말이 진정한 신앙고백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짧게 번역하면, ‘신앙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말발이 신앙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살아내는 신앙이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고 하지만 사도신경 대로 살지 않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는 것이 신앙이고, 신앙고백입니다.
■ 이 사람의 신앙고백에 유대인들은 더욱 당황하며 추궁하듯 그에게 묻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12절, Where is he now?) 이 질문을 단순한 궁금함이 아니라 추궁으로 보는 것은 다음 번 설교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미리 조금 말씀드리면, 그들은 시비를 걸 요량으로 예수님의 행방을 궁금해 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그들의 추궁에 이 눈을 뜬 사람은 매우 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르겠소!”(I don't know.) 이 사람은 매우 당연한 듯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기 전에는 예수님이 눈앞에 계셨지만 볼 수 없었고, 눈을 뜬 다음에는 눈앞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눈 뜬 사람의 이 상황을 우리의 신앙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눈을 뜨고 있는데 예수님이 안 보이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이후에는 우리의 영혼에 예수님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의 눈이 아닌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각과 가치관, 그리고 행위로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잠시 다녀올까요? 31~46절을 보시지요. 무슨 내용입니까? 예수님을 일상에서 만나고 뵐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리는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볼 때 예수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의 나라의 시각과 가치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각이고 가치관입니다. 이것에 눈을 떠야 진짜 눈을 뜬 것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해방이 자유와 기쁨으로 연결되려면 사회적 약자/소수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들을 무시하고 산다면 결코 예수님을 뵐 수 없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매일 매순간 뵀으면 좋겠습니다. 박제화 된 교리가 아닌, 화석화된 신학이 아닌, 실천 없는 신앙이 아닌, 사회적으로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편과 곁이 되어 줌으로 예수님을 매일 매순간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시고 신앙적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