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2. 주일예배 설교(대림절 네 번째 주일)
마태복음 2장 13~23절
아가들아, 미안...
■ 인류학자들은 선사시대의 낮은 인구 증가율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을 일으킨 뒤부터 1만년 만에 인구가 500배 늘어나 60억 명을 돌파했지만, 수렵채집을 하던 10만년 동안의 인구 증가율은 0.001%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의 입장을 내 놓고 있습니다. 하나는, 질병, 기근, 짐승의 습격 등 환경적 요인과 아울러 종족간의 살육으로 선사시대의 인구가 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유아 살해(infanticide)입니다. 먹거리가 부족한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유아 살해로 가족계획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에 모두 동의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중 유아 살해를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 유아 살해는 선사시대 이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와 함께 지속되고 있습니다. 단지 유아 살해의 동기와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 따름입니다. 스파르타를 필두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허약한 시민이 허약한 국가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터라 유아 살해가 용인되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생학적인 유아정책을 지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허약한 아이를 돌보는 것은 국가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유아 살해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유럽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농부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장들이 아들을 선호했기에 딸이 태어나면 제거했습니다. 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18∼19세기에는 유럽 전역에 걸쳐 갓난아기를 내버리는 일이 급증했습니다. 산업화로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 부부들이 식구 수를 줄이는 수단으로 영아 유기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끔찍한 영아 살해와 영아 유기의 역사의 한 사건을 방금 읽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었던가요?
■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뵙고 예를 갖춰 경배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인사가 끝난 후 헤롯 왕과 약속한대로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12절의 메시지입니다.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금까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온 그들이었기에 두 말 않고 지시를 따라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헤롯 왕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의 탄생으로 경악(驚愕)하게 된 헤롯이 안전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도 박사들로부터 소식이 없자 헤롯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의 분노가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16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은 군대를 보내 이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왕위를 가로챌 가능성이 있는 한 아기의 출생 막기 위해 이 끔찍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오, 주님!
그런데 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헤롯은 원래 잔인했습니다. 수많은 측근을 처형한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역사가인 요세프스(Flavius Josephus, 37~100년)에 의하면, 헤롯은 기원전 6~7년경 그의 아내 ‘마리암’과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살해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습니다. 더욱이 헤롯 자신이 후계자로 세운 또 다른 아들 ‘안티파테르’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하기조차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말이 있습니다. “헤롯의 ‘아들’(υἱός, 위요스)이 되는 것보다, ‘돼지’(ὗς, 위스)가 되는 것이 낫다.”
이런 그의 잔인성으로 보아, 자신의 정적(政敵)이라고 판단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인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욕망이 무고한 아기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는, “헤롯은 주님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범죄를 범했으므로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프스가 고발한대로 아내와 세 명의 아들, 아내의 가족들을 살해한 대가로 큰 고통 중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기들의 원한(怨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역사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역사는 정의(正義)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역사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 물론 일시적으로는 정치가 역사를 이기는 듯 보입니다. 13~15절을 보시겠습니까?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언뜻 읽으면, 헤롯이 무서워 하나님이 피신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역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만들어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는지 읽은 본문 세 곳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말씀의 성취에서입니다.
15절, 18절,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이 예언하신 바가 성취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루려 하심이라.” “이루어졌느니라.” “이루려 함이러라.” 물론 18절은 매우 속상하고 아픈 역사입니다. ‘꼭 이러셔야했나?’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역사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뜻 중 최고의 뜻이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이것이 역사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나타나는 역사는 늘 혼란스럽습니다. 대립과 갈등, 분열과 분쟁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종합과 통일로 나타납니다. 부정이 부정 당하는 것입니다. 카오스(χάος)는 코스모스(κόσμος)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탄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 혼돈의 세상을 만들어 놓아도 그 카오스에는 하나님의 코스모스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욥기입니다. 욥이 당한 일들이 얼마나 혼란스럽습니까? 점점 그 누구도 답을 내 놓을 수 없지 않았습니까? ‘욥’조차도 혼란에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단 한 번도 하나님은 흔들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코스모스를 유지하셨습니다. 38장에서부터 41장에 이르기까지 욥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질문은 정말로 날카롭습니다. 그 모든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네가 나의 질서를 아느냐?”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는 중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40장 8절과 9절입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새번역)
욥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42장 1~6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욥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 것 같습니까? 내 인생이 혼란스럽고 삶이 엉망일 때, 그래서 하나님께 내 인생에 대해 따지고 있을 때, 욥이 만난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시절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 때, 아기들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 때, 욥에게 하신 그 질문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것 같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반응, 어떤 태도, 어떤 이야기를 하시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욥처럼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새번역)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도 기대 안 하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욥에게 하신 질문도 안 하실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예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시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욥기서는 여전히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십니다.
■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며 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셨던 분은 오히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오랜 꿈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태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금년 대림절엔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이상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