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6. 주일설교(요한복음강해 39)
요한복음 11장 1~27절
모순(矛盾)과 완벽(完璧)
■ 오늘 본문을 읽다가 고사성어가 두 개 생각났습니다. 보통 고사성어는 네 개의 한자로 되었는데 제게 생각난 것은 두 글자로 된 것이었습니다. ‘모순’(矛盾)과 ‘완벽’(完璧)이라는 말입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앞에 한 말과 뒤에 한 말이 맞지 않아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뜻입니다. 완벽이라는 말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이 두 단어를 떠올리게 했을까요? 자, 설명을 시작해 볼까요?
■ 먼저 ‘모순’(矛盾)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모순의 ‘모’(矛)는 ‘창’을 말하고, ‘순’(盾)은 ‘방패’를 말합니다. 이 모순의 고사는 한비자(韓非子)의 <난세편>(難勢篇)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초(楚)나라에 어느 시장터에서 방패와 창을 팔고 있던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의 방패와 창을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 이 방패를 보십시오. 이 방패는 대단히 견고해서 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창을 집어 들고 외쳐 댔습니다. “자, 이 창을 보십시오.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구경꾼 하나가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보시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앞말과 뒷말이 틀린 것을 두고 모순이라고 하는데, 창과 방패 장사꾼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행동에서 모순된 행동을 만나게 됩니다. 5~7절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가자!’ 하시니”
무엇이 모순입니까?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죽을 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무슨 특별히 꼭 처리하셔야 할 일이 있어서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8절을 보면, 이것이 얼른 가시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였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9~10절에서의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틀을 그곳에 더 머무셨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사랑하신다면서 이틀을 그곳에 더 머무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사랑하시다면 만사를 제치고라도 나사로에게 가셔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순 아닙니까?
사실 이런 모순을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신다면서, 고난이 웬 말입니까? 보호하신다면서, 역경이 웬 말입니까? 인도하신다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웬 말입니까?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서, 왜 아직까지도 침묵하신단 말입니까? 저 악한 사람은 잘 살고 있는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럽습니까? 내 인생에서 하나님은 모순이십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머무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이 한 말은 12절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예수님, 그 말씀 모순 아닙니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순된 말씀과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일까요?
■ 예수님의 이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렸던 고사성어 ‘완벽’(完璧)의 유래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 완벽이라는 한자어는 ‘온전한 구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다고 할 때 사용합니다. 이 옛 이야기는 ‘십팔사략’(十八史略)의 조편(趙篇)에 나오는 ‘화씨지벽’(和氏之璧)에서 유래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옥(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화씨지벽을 손에 넣고 싶어서 성(城) 열다섯과 맞바꾸자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이 제의에 혜문왕은 난처하였습니다.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신들도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누가 사신으로 적임자인가를 중신들에게 묻자, 대부(大夫)인 무현(繆賢)이 그의 식객(食客)으로 있는 인상여(藺相如)를 추천하였습니다.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대책을 묻는 혜문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이 구슬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로 들어오면 구슬은 진나라에 두고, 성이 들어오지 않으면 신은 온전한 구슬을 조나라로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城不入 臣請完璧歸趙)” 인상여는 화씨지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양왕이 그 옥만 갖고 약속한 성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인상여는 목숨을 담보로 한 기지를 발휘하였고, 끝내 소양왕에게서 온전하게 그 구슬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구슬(完璧)을 다시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긴박한 순간에 이틀씩이나 그곳에 더 머무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의 실마리(단초)를 13~1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으셨습니까? 그 실마리는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이틀을 더 머무르신 이유는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까지 기다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설프게 죽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셨던 것은 나사로의 완벽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기대했던 것은 제자들의 완벽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을 기다리셨던 것이고, 완벽한 기적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사로의 죽음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허술하게 우리들의 인생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이 개입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모순으로 보일 때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제한과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인간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허술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순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십니다. 결코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참으로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그래서 믿게 하시려고 가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 나사로가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길을 떠나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다녀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나사로의 두 여 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단단히 삐쳤는지 집에 있고, 마르다만 예수님을 마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21~22절을 말씀드렸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우리는 마르다의 말에서 안타까움과 소망의 믿음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 혹은 섭섭함, 그러나 이 상황을 잘 정리해 주실 것에 대한 소망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소망의 믿음에 23절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굉장한 응답이지 않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아마 예수님은 마리아가 이것을 기대했을 것으로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24절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믿나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마르다가 22절에서 말한 것은 무슨 의미였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마르다의 이 말은 지금 당장이라도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살려 주실 줄 믿는다는 것이 아니었나요? 우리는 22절을 읽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24절의 반응을 보고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를 무슨 의미로 말을 했을까요? 매우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일상의 신앙에서 보이고 있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막연히 주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태도나 반응이 필요할 때면 늘 당황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입니다. 정리 안 된 비성서적인 대답이나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마르다 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정리 안 된 마르다의 태도에 예수님은 분명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셨습니다. 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무슨 의도로 마르다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무엇보다도 ‘네가 부활을 정말 믿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네 오라비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온전한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믿음의 태도, 어정쩡한 믿음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술에 물탄 듯한 이 흐릿한 신앙에 쐬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네가 부활을 정말 믿느냐?’
이 정국을 찌르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는 당황한 것 같습니다. 27절입니다. 24절과는 다른 태도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4절은 불분명했지만, 27절은 분명했습니다. 이제 이 고백에 있어 완벽해진 것입니다.
■ 당연히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불완전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불완전함을 이유로 막연한 믿음의 태도, 어정쩡한 믿음의 모습, 술에 물탄 듯한 흐릿한 신앙을 변명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불완전함을 방패삼는 것은 모순입니다. 어쩔 수 없음을 창삼는 것도 모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순을 극복하려는 경건(敬虔)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무지와 무례함을, 그리고 불완전함과 불안함을 고백하며 완벽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으로 최소한 이 정도의 수고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이런 몸부림은 쳐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비전교인 여러분, 우리의 모순된 신앙 태도가 경건을 추구하는 애씀으로, 완벽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