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3. 주일설교(요한복음강해 40)
요한복음 11장 17~44절
눈물
■ 제가 최근에 ‘눈물’에 대해 공부를 좀 했습니다. 눈물은 98.5%가 물입니다. 그런데 짠맛이 나지 않습니까? 소금성분이 들어있어서 그렇습니다. 또한 1.5% 안에는 항균작용을 하는 성분도 들어있습니다. 락토페린과 리소자임이라는 것인데 눈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눈물이라는 것이 ‘기본눈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눈물이란, 항상 눈을 촉촉히 적셔 조직을 보호해주는 눈물입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외부자극에 의한 ‘반사눈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물질이나 어느 자극제에 의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희로애락 등 감정 상태에 의한 ‘감정눈물’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감정눈물의 경우 항균물질은 적고 수분과 소금의 함량이 많답니다. 특히 분하거나 슬플 때 나는 눈물에는 염분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함민복 시인이 쓴 <눈물은 왜 짠가>라는 산문시가 좀 더 다가왔습니다.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눈물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눈물과 마리아의 눈물,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을 봅니다. 이 눈물들 중 가장 짠 눈물은 누구의 눈물이었을까요?
■ 예수님이 나사로에 대해 들으신 소식을 그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간접적으로 들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들에게 직접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계신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희한합니다. 사랑하시는 가족이신데 왜 이틀을 거기서 더 머무셨을까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러나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11장 15절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이 위험한(?) 일을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사는 동네에 도착하셨을 때 마리아는 그렇게 존경해마지 않는 예수님을 마중하지 않았을 정도로 단단히 섭섭했던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물론 마중 나온 마르다도 섭섭하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21절을 보실까요?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여러분도 이틀을 더 머무신 예수님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러셨는지를 알고 나면, 섭섭함이 조금씩 가라앉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는 말씀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마르다의 섭섭함이 점차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생 마리아에게 갔던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사실 한 번 들어온 섭섭함은 당장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늘 쉽지 않거든요. 그러나 점차 가라앉기는 합니다. 어찌되었던 단단히 섭섭 아니 삐쳐있던 마리아가 언니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라고 말한 뒤, 울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얼마나 섭섭했는지 짐작하시겠죠? 믿은 만큼 섭섭함의 크기가 있는 거죠. 아마 펑펑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33절에 보시면 곁에 있던 문상 온 유대인들도 덩달아 울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의 울음이 모두를 아프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33~35절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참으로 예수님의 눈물은 아파하시는 눈물이었습니다. 오빠의 죽음을 두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시며 함께 아파하시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눈물에 심한 속상함이 보태졌습니다. 곁에 있던 유태인들이 보탠 말 때문이었습니다. 36~38절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유대인들의 대화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속되게 말해, 염장 지르는 대화였습니다. 다시 들어 보실까요?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듣는 사람 속을 확 뒤집지 않습니까? 물론 굳이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남의 속도 모르면서 하는 말은 염장 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믿음을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이성과 육체의 한계 안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을 키우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한계 안에서만 이해하는 것을 벗겨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39~40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信仰)이라는 말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믿을 ‘신’(信), 우러를(믿을, 따를) ‘앙’(仰)입니다. 믿는 겁니다. 그리고 따르는 겁니다. 왜요? 우리가 한계 안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히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에, 그 사랑에 기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뭣 하러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을 교양강좌 수준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상식이 아닙니다. 생명이고 삶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아니 신앙생활을 하시고 싶다면, 제발 예수님을 믿고 따르십시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41~44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보고 계십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모두가 비아냥거리고, 불신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리고 믿음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믿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만을 갖고 불평하는 태도, 불신하고 불안해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누구를? 예수님을!!!
■ 물론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매우 잘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여러분보다도 여러분의 형편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각자의 형편이 여러분의 믿음을 붕괴시키지 못하도록 애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힘들어 한숨 쉴 때, 그 한숨이 예수님의 한숨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에 힘들어 울 때, 그 눈물이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이 어느 날 유독 짜게 느껴진다면, 예수님이 매우 슬피 울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함민복 시인이 그랬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그런데 시인의 눈물보다 더 짠 눈물은 시인의 어머니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예수님의 눈물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눈물이 유독 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난히 나를 위해 슬피 울고 계시다는 강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더 이상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라며 속상해 하지 마시고,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용기를 갖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이 믿음의 모습을 늘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