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7. 주일예배 설교(추수감사절)
시편 136편 1~26절
1111의 감사
■ 11월 10일, 그러니까 지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내 후회한 것이 있습니다. ‘이발 좀 하고 주일을 맞이할 걸...’ 머리가 단정치 않을 것이 내내 걸렸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15년이 넘는 단골 이발소로 서둘러 갔습니다. 월요일엔 손님이 없으려니 했는데 한 분은 이미 이발을 하고 계셨고, 대기 손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갖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차례가 왔고, 주일 내내 거슬렸던 머리가 단정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손질하는 중에 이발소 사장님이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15년 단골이면 이미 제 정치적 성향도 알 법 한데 제 심기를 건드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물론 이 침묵은 15년 우정을 배려한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그 양반의 손에 예리한 이발 도구들이 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면도칼이 두려웠기 때문에 침묵하였습니다.☺
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제 눈치를 보던 이 양반이 슬그머니 축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고 분위기가 안정되었습니다. 이 난국(?)을 무사히 지났고, 서울장신대 강의가 있는 날이라 12시 넘어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 날이 11월 11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빼빼로 먹는 친구들이 여러 곳에서 보였거든요. 그래서 은근히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빼빼로가 도착하겠지?’
그런데 마지막 시간인 6시가 되도록 한 녀석에게도 빼빼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흔한 빼빼로를 말입니다. 살짝 섭섭한 마음으로 마지막 기대를 꿈 꿔습니다. ‘세빛 따님은 주겠지?’ 그래서 따님이 퇴근할 때를 기다려 정류장에 나가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기대감을 갖고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 올 때까지 자신이 야근을 해서 피곤하다는 말만 여러 차례 반복할 뿐 저의 기대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날이 다 지나도록 저는 빼빼로를 일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누굽니까? 희망을 안 접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11일만 날이냐, 12일도 날이다!’며 하루를 연장해서 기다려 보았습니다. 세상에, 12일 늦은 밤까지도 빼빼로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했던 따님은 베트남으로 날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자작극을 벌이자!’ 집에 오자마자 군고구마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다음날 수요일 오전, 숙원 사업이었던 숙변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고구마가 배변활동을 도운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약 빼빼로를 먹었다면 배변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는 사건의 뒤집힘에서 나오기도 한다니까요!
■ 시편 136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탈애굽 사건에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까지의 내용을 두고 감사드리는 시입니다. 이 전 과정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뒤집힘의 사건’들입니다.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선(善)하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에 요셉 때문에 혹은 덕에 들어가 태평(太平)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요셉을 모르는 임금 때문에 노예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강제입영의 형식을 띠긴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 되지 않았습니까?
탈애굽 과정에서 이야기 하나 더 하자면, 홍해라는 장벽을 만났을 때입니다. 얼마나 갑갑했겠습니까? 진퇴양난이지 않았습니까? 앞은 건널 수 없는 홍해, 뒤는 애굽 최강의 군대에 앞으로 갈 수도 뒤를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홍해는 갈라졌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람이 건너가자 뒤 따르던 애굽의 모든 병사들을 홍해가 삼키지 않았습니까? 마음 고생, 몸 고생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애굽의 권력으로부터 완전 해방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고, 만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제가 이 빼빼로를 못 받은 억울함을 수요일 장신대(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신학대학원) 수업에서 했습니다. 아까 해드린 이야기를 그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쉬었다 들어오면서 학교 카페에서 파는 고급 쿠키 두 개를 제게 건네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수님, 빼빼로 대신입니다!’ 와, 감동이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저는 이 때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말해야겠구나. 침묵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나님, 고맙습니다.’ 만약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 귀한 쿠키가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안 주신다고 불평하지 말고, 주실 때까지 기도로 말씀드리자! 아멘!’
■ 로마서 10장 10절을 좀 과감하게 인용해 볼까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렇습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 말을 마음 밖으로 꺼낸다는 것, 참 중요한 일입니다. ‘내 마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겠지?’라고 믿고 산 시간이 많습니다. 그런데 말하지 않으면 대부분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차제(此際)에 다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말하기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불평하지 마시고,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형성사를 보면, 불평할 때마다 망했습니다. 그러다 감사할 때 다시 일어섰습니다. 흥망성쇠(興亡盛衰)라는 것이 늘 이러했습니다. 불평할 때는 망(亡)했고, 감사할 때는 흥(興)했습니다. 감사를 모를 때는 쇠(衰)했다가, 감사를 회복할 대는 성(盛)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기도와 감사는 나누이지 않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마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 것을 차근차근 꺼내기 시작하시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길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으로 보겠습니다. 시편 136편은 모두 26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절마다 공통으로 고백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고, 그 인자하심이 변함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인자’는 무슨 뜻일까요? 어질 인(仁), 사랑할 자(慈)입니다. ‘인자’는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는 고백이 시편 136편 매 절마다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지막 절인 26절에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무슨 제안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라’는 제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감사해야할까?’ ‘감사해야하나?’ ‘감사해야지!’ 마지막 반응인 ‘감사해야지!’이길 바랍니다. 감사는 찾으면 찾을수록 많아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136편이 구구절절 고백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끝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이 영원한 사랑에 마냥 감사하며 사는 여러분을 늘 보고 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