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9. 주일설교(요한복음강해 38)
요한복음 10장 19~42절
유도신문(誘導訊問), 그러나 각개격파(各個擊破)
■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것은 모두의 희망일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나쁜 점수가 희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쁜 점수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시험을 잘 보는 비결을 알고 있는데 좀 알려드리면 어떨까요? 혹시 암기가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혹시 공부시간이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뭘까요?
시험 잘 보는 비결은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관식 문제는 질문의 이해 정도가 점수를 크게 좌우합니다. 글을 잘 썼고, 길게도 썼지만 점수가 안 좋은 것은 질문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잘 썼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간혹 성적이의신청을 합니다. 게다가 불쾌해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잘 이해하듯이 질문을 잘 하는 것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됩니다. 정확한 질문은 정확한 이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질문과 연관된 이야기와 사건들이 눈에 띕니다. 질문하시는 예수님과 질문 받는 사람들,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들과 질문 받으시는 예수님이 눈에 띕니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 본문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개의 개념을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도신문(誘導訊問)과 각개격파(各個擊破)입니다. 유도신문이란, 질문자가 자신이 희망하는 답변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신문방법입니다. 그래서 소위 밀땅(밀고 땅김)이 길게 진행되곤 합니다.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말입니다. 각개격파란, 적을 따로따로 격파한다는 뜻이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관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오늘은 후자입니다.
본문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장면들이 여럿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답변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도신문과 각개격파가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유도신문은 양쪽, 즉 사람들과 예수님 모두 사용하지만, 각개격파는 예수님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이 모든 것이 흥미롭습니다.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신의 ‘선한 목자론’을 설명하시는 중에 분쟁이 일어난 것으로 시작합니다. 19절입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한복음 1장에서 지금까지 쭉 보셨다시피, 매 장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늘 갈등과 긴장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실 때마다 이 갈등과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 어떤 분쟁입니까? 20~21절입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이 분쟁은 예수님을 두고 ‘미친 사람이다, 아니다.’의 시비입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알고 나면 예수님은 정상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정상입니다.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모르면 당연히 미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뒤 수전절에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수전절은 성전 봉헌절(חנוכה, 하누카)로 유대인의 절기입니다. 매년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8일간 지키는 절기로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하게 한 후 드린 예배에서 기원된 절기입니다. 이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회랑, 복도, porch)을 거니실 때 유대인들에게 에워싸이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24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우리로 추측 만하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라는 요청 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25~30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런 겁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말하라고 하느냐?’ 그리고 이 답변의 결정적인 것은 30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도신문 했습니다. 이들이 유도신문을 통해 노린 것은 이 말을 부인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이 나오기를 유도했던 것입니다. 트집 잡을 건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사회는 예수님을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는 자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건수를 다시 잡은 것 아니겠습니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자 바로 31절의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사실 이러한 행동이 진작부터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돌을 들어”라는 상황 설명이 나온 것입니다. 이 상황을 만난 예수님은 돌을 든 이들과 생사를 가르는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일명 각개격파 방식을 사용하여 이들과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32~33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님의 ‘뭐가 문제냐?’라는 질문에 ‘신성모독이 문제다!’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른다면 이 대답은 자연스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26절 설명에 의하면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나올 수밖에 없는 대답입니다.
이제 34~38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의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설득 논지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설득 논지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다 신(神)이라고 하셨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두 개의 반문에 결정적인 쐐기로 37~38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뭡니까? ‘나를 못 믿는다면 내가 행한 일은 믿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놀라운 설득 논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가 한 일은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설득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운행과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거대한 자연의 운행과 법칙은 불가능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난번과 똑같은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39절입니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그들이 취한 행동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한 것’입니다. 이 행동은 매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잡히실 때가 아니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그곳으로 가셨습니다.(40절)
그런데 요단강 저편 그곳은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41~42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어떻습니까? 앞의 곳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죠? 앞의 곳은 거칠었지만, 여기는 좀 따뜻하지 않습니까? 앞의 곳은 시비를 위한 분위기였지만, 이곳은 이해와 수용력이 높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경험합니다. 수용과 거부, 이해와 거절, 긍정과 부정, 호응과 냉담, 열정과 냉정 등과 같이 상반된 분위기를 경험합니다. 예수님 때부터 이랬던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떤 경우를 만나도 내가 잘못해서 거부와 거절, 부정과 냉담, 그리고 냉정함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다가 주눅 들지 마십시오. 원래 그러려니 하십시오. 예수님도 피하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는 일이 있음도 놓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거기’는 있습니다. 수용과 이해, 긍정과 호응, 그리고 열정을 만나는 ‘거기’가 있습니다. 혹시 ‘거기’를 이미 경험하셨을 수도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반드시 있습니다. 아직도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있습니다.
■ 세상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성인(聖人)으로만 볼 것을 유도신문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복음은 불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설득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태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각개격파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논지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득력 있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말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상은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의 실패입니다. 한국사회는 이상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말이 아닌 삶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각개격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비전교회가, 우리 비전교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복음의 증언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주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