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3.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1)
요한복음 7장 25~52절
잡는 것이 아닙니다. 잡히는 것입니다.
■ ‘착각은 자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도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의라는 면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히 결례되는 태도입니다. 혹시 상대의 인격에 손상이 갈만한 태도가 될 수도 있다면 이는 더욱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소통의 부재 혹은 소통의 무시로 인해 나타납니다. 어째서 소통의 부재가 생길까요? 무엇 때문에 소통의 무시가 생길까요? 이유는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그 중 주목하고 싶은 것은 교만입니다. 상대를 얕잡아보기에 나타나는 태도인 교만입니다. 상대를 자신보다 하수라고 여기기에 상대와 소통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과 소통해본 적이 없거나 소통을 소홀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소통이 없는데 무슨 이해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 사실을 꽤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실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 나라는 드러내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당황하였습니다. 글을 배운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 그가 유창하게 글을 읽고, 읽을 뿐만 아니라 글의 뜻을 유창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의 당황하는 반응은 다양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미친 놈’이라고 하였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가짜’ 또는 ‘사기꾼’이라고 하였습니다. 25~27절입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어디서 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가 안다. 그러니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가짜다. 사기꾼이다.’ 이런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어도 마땅한 자’로 여겼습니다. 30절, 32절, 44절, 45절을 보면,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 보입니다. 잡아서 죽이려는 것이지요.
이 다양한 반응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는 것을 반박은 해야겠는데 반박거리가 궁색(窮色)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증거와 현장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만으로도 반박이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만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가나 혼인집의 기적, 38년 된 불치병 환자를 고친 기적, 물위를 걸으신 기적 등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할 기적들이 차고 넘치기에 반박은 불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미치광이’라고 몰아붙이고는 있어도 민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짜’요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여 마땅한 자’라고 몰아붙이지만 소리만 컸지 속은 초라했던 것입니다. 당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러한 태도를 취했을까요?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행위를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걸러 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자신들의 편견으로 걸러 들은 것입니다.
33~36절의 예수님과 사람들 간의 대화를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두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사람들은 땅의 관점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해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범법자로, 신성모독죄로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30~31절에 그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직 잡히셔야 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부수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론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여론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상당한 여론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미치광이’ ‘가짜’ ‘사기꾼’ ‘죽여야 할 자’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31절입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40~41절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 중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잡는데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어쩌면 이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들을 차분하게 곱씹고 따져보았던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묻고 따지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님을 믿자! 따르자!’
■ 그렇습니다. 묻고 따져보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묻고 따짐의 미학’을 멋지게 제시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니고데모입니다. 우리가 3장에서 만났던 그 니고데모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자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 나선 것입니다.
50~51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새번역)
니고데모는 유대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율법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정치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많은 점령지를 쉽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에 지방자치정부를 허용하였는데 이러한 로마의 정책에 편승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은 총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71명 중 한 명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이처럼 중앙정치의 한복판에 있는 그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리를 만났고, 진리 안에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만났고, 영원한 나라 안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영생의 눈으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오해하고 곡해하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나 답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적 위협을 무릅쓰고 앞에 나선 것입니다. “먼저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 나서 사람의 죄를 판결하는 것이 우리 율법에 맞지 않습니까?” 니고데모의 말인즉, ‘들어 보고, 알아보고, 물어 보고, 따져 보고’ 난 후 신중하게 판결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태도가 아니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24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태도가 아니냐는 반문이었던 것입니다.
건국 이래 우리나라의 검찰이 보여주는 행태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미리 정한 서론, 본론, 결론에 맞춰 피의자(被疑者)를 조사하는 행태입니다. 피의자가 검찰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몇 번이고 재소환을 합니다. 심지어는 맥락을 뺀 조각난 정보를 언론사에 흘려 여론몰이를 합니다. 공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선입견 없이 ‘들어 보고, 알아보고, 물어 보고, 따져 보고’ 난 후 신중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꼭 52절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미 주입된 편견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곧 본문으로 만나겠습니다만, 8장의 끌려나온 여인 이야기가 이러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검찰의 행태가 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언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검찰과 언론, 꼭 개혁되어야 할 집단입니다.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만.
■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미치광이’로, ‘가짜’로, ‘사기꾼’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죽여야 할 자’로 판단했기에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잡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소통의 부재 혹은 소통의 무시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제대로 들어보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의 삶과 시간을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의해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시간이 예수님께 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내 삶이니, 내 시간이니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삶과 시간이 예수님께 잡혀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내 인생 내가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님도 함부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