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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7.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3)
요한복음 8장 12~30절
질문, 질문, 또 질문
■ 질문은 참 좋은 학습방법입니다. 지식을 완성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자기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질문입니다. 이해의 끝이 지식의 자기화이기에 이해를 돕는 질문은 너무도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학생이라면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선생이라면 질문을 받으십시오.
물론 의도가 불순하거나 의심스런 질문도 있습니다. 지식의 축적이나 완성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질문은 의도가 불순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동문서답식의 질문도 있습니다. 방향과 내용을 잃은 엉뚱한 질문이 동문서답식 질문입니다. 뭐라고 답해야할지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세 개의 질문이 나옵니다. 19절, 22절, 그리고 25절입니다. 과연 이 세 개의 질문들은 어떤 태도와 의도를 가진 질문일까요? 예수님은 이 질문들에 어떤 반응과 답을 내 주셨을까요?
■ 우리가 읽은 본문이 12절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11절의 연속적 사건인지가 궁금해집니다. 12절의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설명으로 봐서는 11절과 연속적 사건으로 보입니다만, 이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타난 것으로 보면 비연속적이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되십니까?
혹시 오늘 본문이 괄호로 묶여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7장 53절 앞에 보면, 1)이라는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의 설명을 보면, ‘어떤 사본에, 7:53부터 8:11까지 없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을 따라, 이 부분을 가리고 7장 52절과 8장 12절을 연결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의 연속성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내용이 왜 있는 것이며, 우리 번역본에는 이 내용을 왜 소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요한복음의 편집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매우 독특하고도 재미있게 되었다는 것을 각 장의 앞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장 앞부분에는 대형 사건이 하나씩 소개되어 있습니다. 2장을 보시면, 가나의 혼례식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있습니다. 3장을 보시면,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사건이 있습니다. 4장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와의 우물가 대화가 있습니다. 5장을 보시면, 38년 된 불치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6장을 보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8장은, 잡혀온 여인 사건이 있습니다. 9장을 보시면, 나면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실로암에서 고쳐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11장을 보시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있습니다. 12장을 보시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이 있습니다. 13장을 보시면, 소위 세족식 사건이 있습니다. 17장을 보시면, 대제사장의 기도가 있습니다. 18장은, 잡히신 일, 19장은, 고난 받으신 일, 20장은 부활하신 일, 21장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장 앞부분에 큰 사건을 소개하고는 이것과 연관된 말씀을 세상에 내주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 장마다 특징적인 내용과 말씀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8장에 다른 사본에 없는 내용을 편집한 것은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좀 더 극대화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이렇게만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은 이 사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정죄가 아닌 해방의 자리로 이끌어 주신 은혜입니다.
■ 7장에 이어 8장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8장 중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임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시는 세상의 빛이시자, 죽음에서 구출해 주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 없는 세상은 어둠이요 죽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어야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또 다시 발끈한 바리새인들이 손으로 X 표시를 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3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바리새인들의 말인즉, 자기가 자기를 증언하는 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웃기지 말라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긴 설명을 하셨습니다. 14~1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님의 이 긴 설명은 한 마디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내가 진실이 아니면 무엇이 진실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진실이 아니라면 무엇이 진실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 13절을 통해 이것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심은 다음 설교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 중에 재미있는 설명이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율법을 인용하시면서 셈을 하신 내용입니다.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참이 된다고 했는데, 내가 증인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증인이시니 두 사람의 증인이 확보 됐으니 내 말이 참된 것이 아니냐는 설명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유머러스함이 돋보이는 말씀입니다.
■ 이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본문의 세 개의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을 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의 의도는 역시 속이 들여다보였습니다. 궁금함이 아닌 빈정거림이었습니다. 이들의 말의 의미인즉, 네 아버지는 요셉인데 누구더러 아버지라는 것이냐는 빈정거림이었습니다.
이들의 빈정거림에 예수님의 대답은 14절과 이어지는 1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9절,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온통 오해와 불신만 보이는구나!’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했고, 잘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아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빠지는 오류 중 하나가 신앙/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과도한 착각입니다. 전적으로 자기 편의주의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해석/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사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주의적 태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북한에 대한 배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민족이 무엇이며, 평화와 통일이 무엇인지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불신앙적 태도입니다.
얼마 전, 제 수업을 듣는 한 학생으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소위 영파(靈派)인데, 기도를 많이 하시고 특별히 영서(靈書)를 받는 은사가 있는 분이랍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영서를 받았는데 현재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가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하나님의 점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해야하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시더랍니다. 이 답답한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느냐며 상담을 해왔습니다.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요? 며칠 전에는, 교회세습을 감행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는 명성교회 김삼환 원로목사가 던진 말이 기가 막힙니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탄의 중심에 있는 전광훈 목사는 지난 10월 25일 광화문집회에 나오지 않는 이들은 모두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참으로 기운 빠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할 뿐 돈으로 움직이는 교회를 만든 이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질문에 답하신 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이 시점에서 왜 하셨을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로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두 번째 질문을 하였습니다. 22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이들의 이러한 질문은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죽음을 이야기 하신 이후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들의 수준에 맞는 질문은 ‘자결을 하려는가?’였던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그들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2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들은 세 번째 질문을 하였습니다. 25절입니다. “네가 누구냐?”(Who are you?) 이 질문은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며 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25~26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수도 없이 나에 대해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하늘로부터 온 자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낸 자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27절) 그러자 28~29절을 통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우리의 눈을 의심할만한 설명이 이 말씀 뒤에 나타납니다. 3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드디어 이들에게 믿음이 들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이것은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졌다는 정도인 것입니다. 이는 다음 번 설교에서 더 자세히 다루게 됩니다.
여하튼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관심이 생겼다는 정도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2장 이후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떠나는 일들을 보았습니까? 교회는 나왔으나, 신앙은 고백했으나, 구원의 끝까지 가지 못한 이들이 많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많은 세상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질문은 신앙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바른 질문, 알고자 하는 간절한 질문만이 신앙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되 질문하십시오. 바리새인들의 시비형 질문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낸 니고데모처럼 진지한 질문을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어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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