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8. 주일예배 설교(대림절 두 번째 주일)
마태복음 1장 18~25절
굳이 이렇게까지...
■ 2015년도에 인천시 동구청이 어떤 프로그램을 하나를 만들었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습니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가면 ‘괭이부리 마을’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만들어진 쪽방촌으로 대표적인 빈민지역입니다. 이곳에 인천 동구청이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을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이 된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지방자치단체가 가난을 상품화해 쪽방촌과 마을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다고 반발한 것입니다. 많은 국민들도 쪽방촌의 상품화 소식에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며 격양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두고 하는 말 중 하나가 ‘굳이 이렇게까지...’입니다.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감하거나 민망할 때도 이 표현을 씁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23절) 도대체 무슨 경우가 벌어진 것일까요?
■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을 약속하고 날을 잡았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날을 손꼽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물론 성인이니 임신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임신이 청천벽력이었던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만 잡았는데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요셉 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임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요셉도 당연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음이 몹시 상했지만 점잖은 사람인지라 마리아에게 욕되지 않게 문제를 조용히 매듭짓기로 했습니다. 요셉으로서는 최선의 배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마리아로서는 더욱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자신에게 임신이라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하나님이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절)
좀 세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사고를 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내리신 결단이셨지만, 마리아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처녀의 임신이니 앞으로 마리아의 인생을 다 망친 것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점잖은 요셉도 파혼을 결심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물론 요셉을 포함해서, 가혹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의 사자(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이런 변명을 하셨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의 변명은 무엇이었나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두 가지였죠? ①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② ‘예수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변명 중에도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무엇인가요? ①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②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여러분은 이 두 가지 변명과 이 두 개의 명령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곱게 들리십니까, 곱지 않게 들리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듭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번역본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참 난폭하시다’라는 생각을 갖게끔 만듭니다. 말투가 비인격적이시고, 태도가 반인륜적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단코 하나님은 결코 비인격적이시거나, 반인륜적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번역본은 이렇게 읽혀져야 합니다. 들어보시죠. ‘내가 사랑하는 믿음의 자손 요셉아, 너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이 방법이 아니면 달리 방법이 없구나. 내가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야 너희 모두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될 터이니 이 방법뿐이구나. 무엇보다 너의 아내가 될 마리아에게 태어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하구나. 그러나 어쩌겠니? 누군가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와야 하는데 내가 마리아를 택했단다. 그러니 이 모든 현실을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물론 하나님의 결정은 일방적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 결정권자가 하나님이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의 태도는 비인격적이시거나 반인륜적이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주저 말고 결혼하거라.)고 하신 말씀에서 읽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셔야 했기에 고심 끝에 마리아의 몸을 빌리기로 하셨습니다. 미안한 마음 가득 가지시고 마리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 하나님의 부탁의 요청을 받은 요셉은 하나님의 진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24~25절의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하나님의 부탁에 응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부탁이기 때문에 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심과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진심을 알았고, 마리아와 자신을 통해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였습니다. 즉시 결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까지 잠자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기에 의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 나서는 태도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물론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과 선하심이 그를 바꾸어놓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심과 선하심은 깊고 무궁하십니다. 22~23절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의 진심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임마누엘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를 오래 전에 약속하시고, 이를 반드시 지키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진심을 알기까지, 어쩌면 이 진심을 받아들이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마음고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물론 요셉만 힘들었겠습니까? 마리아도 힘들었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라며 힘들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힘든 일을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영광을 품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만세에 요셉과 마리아의 이름이 불리는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라며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해하기 어렵고, 민망한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나름 부끄럼 없이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데없는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는 생각 대신에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라는 불평과 불만이 먼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일방적으로는 결정하셔도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결정을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결정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 불합리한 결정인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카오스 혹은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도 하나님에게는 질서/코스모스입니다. 카오스는 하나님의 코스모스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라는 상황을 만나도 더 이상 불평과 불만을 갖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대림절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