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9. 주일예배 설교
야고보서 4장 13~17절
‘오늘 살기’와 ‘내일 있기’의 변증법
■ 우리는 어느새 2019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이렇게 빨리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시간은 이렇게 빠릅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를까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카이로스’라는 신이 등장합니다. 카이로스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앞머리는 길고 뒷머리는 대머리입니다. 게다가 어깨와 발목에는 날개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앞머리가 이렇게 무성한 것은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카이로스는 ‘모든 것이 다 기회와 때가 있다’는 교훈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신의 개입의 기간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카이로스를 이야기 한 김에 크로노스까지 이야기 해 볼까요? 헬라에는 두 개의 시간 개념이 있는 데 ‘카이로스’(καιρός)와 ‘크로노스’(χρόνος)입니다. 크로노스는 인간 역사 속에 흐르는 연대기적 시간, 즉 해가 뜨고 지는 결정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반복해 매일 어김없이 낮과 밤이 찾아오는 시간, 즉 동식물이 생기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시간, 수직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인간의 역사(시간)를 의미하고, ‘카이로스’는 신의 역사(시간)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 질문부터 하나 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장사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13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 사람들은 어떤 시간관을 갖고 있을까요? 크로노스인가요, 카이로스인가요? 헷갈리시죠?
기회를 잡기 위해 수고하는 것으로 봐서는 카이로스인데, 단순히 1년이라는 시간을 상정한 것으로 보면 크로노스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카이로스라는 생각이 확 듭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하나님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의 뜻이면”
그러나 이들이 궁극적인 관심이 어디 있는지를 본다면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13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들의 관심은 오늘과 내일과 일 년이라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은 ‘장사’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장사가 이들의 관심입니다. 시간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물론 이들은 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시간은 공간 확장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크로노스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14절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들의 관심은 공간 확장이었고, 공간을 통한 영광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결국 관심사가 시간도 아니고 공간이었기에 그들에게 내려진 질타는 매우 강했습니다. 16절을 봅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새번역) 그들의 시간관을 포함해 공간 확장을 꿈꾸던 것에 대해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 우리는 매우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니 확대니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물질과 연관된 공간적 개념입니다. 집을 크게 짓고, 창고를 넓히고 하는 것은 다 공간 개념인데, 모두가 물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시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 시간으로 이해해야 하나요? 하나님 나라는 역사(歷史, history)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시간이지 공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간일까요? 당연히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시간인 카이로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상승(上昇)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상승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즉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승만 하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반드시 회귀(回歸)도 필요합니다. 회귀란, 하나님의 뜻을 내면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가서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과정이 회귀입니다.
이 상승과 회귀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신앙의 상승과 회귀가 기능하지 못한다면 기능장애가 생깁니다.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시간이 작동되는지를 점검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17절은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새번역)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이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2019년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를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 공간을 탐하여 공간의 확장/확대에 온 신경을 쓰고 살지는 않았는가? 신앙의 상승과 회귀를 위해 수고하였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내일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내 드리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이지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살기’이고, ‘내일 있기’입니다. 오늘을 살기에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꿈꾸고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맡기고 지금 여기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의 의미입니다. 2020년이 걱정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일인 2020년은 2020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고, 오늘 2019년 12월 29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