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5. 주일예배 설교
이사야 32장 8절
존귀한 자 되기, 존귀한 일 하기 (1)
■ 오래 전에 들은 황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실감이 전혀 없는 이야기여서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새겨 둘만한 내용이 있기에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한 청년이 한밤중에 강둑에 앉아 강을 쳐다보다 무엇에 흥이 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더랍니다. 그러더니 재미삼아 주위에 있는 돌멩이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강물에 던지더랍니다. 하나를 던지고, 둘을 던지고, 셋을 던지고, 그렇게 밤새도록 던졌답니다. 드디어 날이 밝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던질 돌멩이를 집어 들었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의 손에 들은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황금덩어리였더랍니다! 세상에! 그가 밤새도록 던진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황금덩어리였던 것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그 귀중한 황금을 전부 강 속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이죠?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 같은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이렇게 허무하게 내던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혹시 그렇지 않은가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재능이 천년만년 유지되는 것도 아닌데, 특히 시간과 재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라고 주신 선물인데, 이를 낭비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나눌 말씀과 깊이 연관이 있습니다. ‘존귀한 자 되기’와 ‘존귀한 일 하기’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이사야 32장 8절) 이 말씀은 2020년 비전교회의 말씀이고, 이 말씀에 의해 ‘존귀한 자 되기, 존귀한 일 하기’는 2020년 비전교회의 표어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존귀”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귀’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존귀”라는 뜻을 이해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존귀한 자”이고, 무엇이 “존귀한 일”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에 “계획”이라는 것, “섦”이라는 것, 그리고 “항상”이라는 것도 더불어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니 무엇보다도 우선 누가 존귀한 자인지를 알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질문하겠습니다. 누가 존귀한 자일까요? 아직 존귀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질문입니다. 누가 존귀한 자일까요? 읽은 본문 앞의 5~7절에 이것의 답이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5~7절에 예시되어 있는 부정어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어리석은 자”, “우둔한 자”, “불의”, “간사”, “패역”, “여호와를 거스름”,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함”,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함”, “악한 자”, “악”, “악한 계획”, “거짓말” 등 이런 것들이 부정어입니다. 바로 이 부정어들의 부정이 “존귀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존귀한 자일까요? 이러한 부정을 부정하고, 저항하고, 혁명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6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즉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사람 우리들입니다. 성도가 존귀한 자입니다.
놀랍죠? 바로 성도인 우리가/내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내가 존귀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이고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거스를 수 없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고도 당연히 “존귀”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5~7절에서 부정어들을 찾아낸 덕에 “존귀”라는 뜻을 더불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존귀란, 부정의 부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귀”란, 어리석지 않은 것, 우둔하지 않은 것, 불의하지 않은 것, 간사하지 않은 것, 패역하지 않은 것,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것, 주린 자의 속을 비지 않게 하는 것,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악하지 않은 것, 악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등이 존귀입니다.
■ 그렇다면 질문하기로 했던, 무엇이 “존귀한 자”이고, 무엇이 “존귀한 일”인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정을 부정하는 자가 존귀한 자이고, 이러한 부정을 부정하는 일이 존귀한 일입니다.
무엇이 “존귀한 자”입니까? 어리석지 않은 자, 우둔하지 않은 자, 불의하지 않은 자, 간사하지 않은 자, 패역하지 않은 자,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자, 주린 자의 속을 비지 않게 하는 자,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자, 악하지 않은 자, 악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는 자, 거짓말하지 않는 자입니다.
무엇이 “존귀한 일”입니까? 어리석지 않은 일, 우둔하지 않은 일, 불의하지 않은 일, 간사하지 않은 일, 패역하지 않은 일,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일, 주린 자의 속을 비지 않게 하는 일,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일, 악하지 않은 일, 악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는 일, 거짓말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처럼 5~7절에 제시하신 부정의 태도/삶을 부정하는 일체의 태도/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존귀한 자이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 존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부정의 것들, 즉 ‘어리석음’, ‘우둔함’, ‘불의함’, ‘간사함’, ‘패역함’, ‘거스름’, ‘착취와 폭력’, ‘악을 도모함’, ‘거짓말’ 등에 대해 개념적(槪念的)으로 담론적(談論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것들에 대해 종합적인 이해를 해 볼까요? ‘어리석음’, ‘우둔함’, ‘불의함’, ‘간사함’, ‘패역함’, ‘거스름’, ‘착취와 폭력’, ‘악을 도모함’, ‘거짓말’은 크게 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옳음/진리와 옳지 않음/비진리를 구별하지 못해 헤매는 ‘어리석음’, ‘우둔함’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옳음/진리와 옳지 않음/비진리를 구별할 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하는 ‘불의함’, ‘간사함’, ‘패역함’, ‘거스름’, ‘착취와 폭력’, ‘악을 도모함’, ‘거짓말’이 있습니다.
물론 몰라서 짓는 죄가 알면서 짓는 죄보다 덜 악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면책의 사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죄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귀를 추구하는 존귀한 자인 성도들인 우리는 존귀함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존귀한 일입니다.
■ 그러기 위해 매일 존귀한 일을 계획해야 합니다. 부정을 부정하는 일을 계획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존귀한 일에 서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떤 유혹이 있어도 부정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존귀한 일을 계획하고, 항상 존귀한 일에 서는 일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불편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익숙한 것이 편리하기는 해도 본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습관 혹은 관습이라는 이유로 질문을 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존귀한 태도가 아닙니다. 혹시 존귀한 태도를 점잖음으로 치부(置簿)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존재 조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익숙함, 습관, 관습, 혹은 전통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신학/신앙 전통이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것을 찢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든 일입니다.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과 모순을 받아들이고 견뎌내면, 우리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생에 이런 모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든 인생/생명과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말한 ‘상처를 낸 자가 다시 상처를 치유한다.’는 말의 의미일 것 같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존귀한 자로 산다는 것이 귀한 일이긴 하지만, 감당해야 할 아픔도 있습니다. 우선은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제법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세력들과 결별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찢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아프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존귀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존귀한 자가 되고, 존귀하게 살아가라고 하셨기에 숙명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숙명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입니다. 이로써 삶은 희망이 되고,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희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화해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희망과 화해가 필요한 시대에 여러분 모두 존귀한 자로 살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황금을 돌멩이로 알아 허무하게 다 날려버린 청년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이 소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2020년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이사야 32장 8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