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2. 주일예배 설교
이사야 32장 8절
존귀한 자 되기, 존귀한 일 하기 (2)
■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이 쓴 소설 중에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영국의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왕자 시절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거지와 자리를 바꾼 후 온갖 모험을 겪고 난 이야기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고, 자신이 거지 생활 동안 겪었던 빈민들의 참상을 거울삼아 선정을 베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우리의 설교 주제인 ‘존귀’(尊貴)에 대한 이해를 얻고자 합니다. 존귀의 단어 뜻은, ‘지위나 신분이 높고 귀함’이라는 뜻입니다. 지위나 신분이 사람의 귀천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이 『왕자와 거지』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귀천을 정했던 당시의 상류사회의 천박함에 대해서였습니다. 민중들은 억울했고, 상류층은 각종 특혜를 누리며 천박하게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오히려 거지인 톰 캔티는 매우 우울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마을 신부님의 교육으로 말도 온순하고 예의도 갖춘 부족하지만 외국어도 쓸 줄 아는 소년이 됩니다. 왕자와 역할을 바꾸었을 때, 왕자와는 달리 빠른 시간 안에 궁중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지위나 신분이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이사야 32장 8절)는 2020년 비전교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존귀한 자 되기, 존귀한 일 하기’는 2020년 비전교회의 표어입니다. 그렇기에 ‘존귀’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왕자와 거지 이야기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고자 합니다. 존귀란 무엇입니까? 사람의 됨됨이가 사람의 귀천을 정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존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귀천을 정하는 것이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난 주 나눈 말씀으로 재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존귀가 무엇인지에 대해 본문 앞의 말씀인 5~7절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5~7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부정어입니다. “어리석은 자”, “우둔한 자”, “불의”, “간사”, “패역”, “여호와를 거스름”,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함”,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함”, “악한 자”, “악”, “악한 계획”, “거짓말” 등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 즉 이와 반대로 사는 것이 존귀입니다.
자리와 신분이 존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모습, 어떤 태도, 어떤 삶을 사느냐가 존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부정에 부정하는 것, 그것은 부정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혁명하는 것입니다.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판을 새롭게 갈아 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싫어!’ 만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싸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정에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는 자가 존귀한 자입니다. 이 모든 부정/부정의들과 마주하고 싸우는 자가 존귀한 자입니다. 5~7절의 말씀으로 정리해 볼까요? “존귀한 자”란, 어리석지 않은 자, 우둔하지 않은 자, 불의하지 않은 자, 간사하지 않은 자, 패역하지 않은 자,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자, 주린 자의 속을 비지 않게 하는 자,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자, 악하지 않은 자, 악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는 자, 거짓말하지 않는 자입니다.
■ 그렇다면 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1. 먼저 ‘어리석지 않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이야기로 이해해 볼까요?
그가 한창 저술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답니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바닷가에서 한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다 모래에 붓고 있더랍니다. 궁금해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어 바다를 마르게 하려고요.” 이 대답에 어이없어 그 아이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답니다. 그러자 아이는 도리어 비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당신이 조그만 지식을 믿고 하나님의 무궁한 신비를 캐내려 하니, 그 어리석음이 나의 행위보다 더합니다.”
어리석음이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태도입니다. 조금 알아 놓고는 다 알게 된 것처럼 구는 태도입니다. 참으로 이런 태도는 비일비재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런 인간들에게 ‘이성의 한계’를 날카롭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초월의 세계를 입증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난센스라며 인간의 한계를 무섭게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건방을 떠는 일체의 태도가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의 특징은 어수룩함이 아닙니다. 어리석음의 특징은 교만이고 시건방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지 않은 자는 겸손한 태도를 지닌 자입니다. 한계 안에서 겸손히 배우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지식을 나누는 자입니다. 이것이 존귀한 자입니다.
2. 다음으로 ‘우둔하지 않은 자’는 누구입니까? 어리석지 않은 자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어리석지 않은 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이고, ‘우둔하지 않은 자’는 자기 고집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비슷하기는 하죠? 자기 고집은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데 집착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남의 말을 안 듣습니다. 듣는 척하기도 하지만 자기주장대로 합니다.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나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높은 길을 따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나귀가 갑자기 뛰어가 깊은 벼랑 가장자리로 도망쳤습니다. 나귀가 몸을 던지는 동안, 주인은 나귀의 꼬리를 잡고, 나귀를 뒤쪽으로 당기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나귀의 꼬리를 풀어주며 말했습니다. “그럼 맘대로 해봐. 하지만 너는 대가를 치룰 거야!” 나귀는 주인이 풀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렇게 나귀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둔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고집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고집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존귀입니다.
3. 하나만 더 정리해 볼까요? ‘불의하지 않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살아내고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단지 착하게 혹은 순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불의의 모든 구조들을 뒤엎는 것입니다. 개혁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한 랍비가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우리가 가진 금과 은이 갖고 싶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알렉산더는 “나는 금과 같은 보화는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조금도 탐나지 않소. 다만 당신들 유태인들의 전통과 당신들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두 명의 사나이가 랍비를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상담 내용인즉, 어떤 사람이 넝마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넝마를 판 사람에게,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 것은 아니요. 그러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넝마를 판 사람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넝마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모두 당신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판정을 내렸습니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후,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은 사리일 것이오.” 그리고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왕님,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떤 판결을 내리십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간단하게 답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의요.”
이렇게 랍비의 정의 이해와 알렉산더의 정의 이해가 다르듯, 우리의 일상에서의 정의의 이해가 헷갈리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의의 목적은 화해와 생명입니다. 이 목적에 위배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와 독서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독서 둘 다 지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불의하지 않은 자는, 샬롬을 방해하는 모든 부정의에 대해 저항하고 그 판을 뒤엎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화해와 생명의 원칙에 의해 샬롬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해내야 합니다. 존귀한 자의 숙명입니다.
■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 중에 『미운 오리 새끼』가 있습니다. 우연히 오리 알에 섞여서 부화하게 된 백조가 오리들로부터 구박 받으며 사는 이야기입니다.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던 백조는 어느 날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백조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좀 비약을 해서 설명하자면, 우리는 백조입니다. 오리가 아닙니다. 백조는 백조입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입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이 숙명입니다. 어리석지 않은 자로, 우둔하지 않은 자로, 불의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견뎌내야 합니다. 올 한 해, 존귀한 자의 기품과 삶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