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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9. 주일예배 설교
이사야 32장 8절
존귀한 자 되기, 존귀한 일 하기 (3)
■ 혹시 기억나시나요? 지난 주 설교에서 랍비가 제시한 정의 개념과 알렉산더 대왕이 갖고 있던 정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넝마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넝마를 판 사람에게 금화를 돌려주면서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 것은 아니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넝마를 판 사람은 “나는 당신에게 넝마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황금도 모두 당신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상담을 받은 랍비는 판정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후,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시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 이것이 나의 정의요.”
각자가 갖고 있는 개념은 자신의 삶의 시간에 의해 구성된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저마다 주체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주체적이기는 하지만, 바른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성서적/신학적 개념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는 존귀한 자로 살기 위해, 존귀한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 우리는 여러 주에 걸쳐 존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본문 앞의 말씀인 5~7절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5~7절에 묘사되어 있는 부정어들을 오늘도 정리해 볼까요? “어리석은 자”, “우둔한 자”, “불의”, “간사”, “패역”, “여호와를 거스름”,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함”,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함”, “악한 자”, “악”, “악한 계획”, “거짓말”
그렇기에 존귀란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 이런 부정의 모습과는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면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싫어!’라는 말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싸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정에 부정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자”란, ‘어리석지 않은 자’, ‘우둔하지 않은 자’, ‘불의하지 않은 자’, ‘간사하지 않은 자’, ‘패역하지 않은 자’, ‘여호와를 거스르지 않는 자’, ‘주린 자의 속을 비지 않게 하는 자’,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자’, ‘악하지 않은 자’, ‘악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는 자’, ‘거짓말하지 않는 자’입니다.
■ 지난 주일에는 존귀한 자로서 ‘어리석지 않은 자’, ‘우둔하지 않은 자’, ‘불의하지 않은 자’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뒤를 이어 나누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문맥의 구조를 따라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는 6절과 7절이 한 통(通)으로 읽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다시 보실까요?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그러면 지난주에는 왜 하나하나 구분해서 말씀을 나눴을까요? 그것은 ‘어리석음’과 ‘우둔함’과 ‘불의함’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살펴보면, ‘어리석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둔함’은 자기 고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불의함’은 샬롬을 방해하고 화해와 생명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태도입니다.
자, 이제 6절과 7절로 가보겠습니다. 6절은 어떤 사람을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입니다. 7절은?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 어리석음, 우둔함, 불의함의 개념들이 설명어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이 개념들을 먼저 설명한 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 존귀함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연 어리석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 특징이 있습니다. 6절을 따라 정리해 볼까요? 1. 어리석은 것을 말합니다. 2.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합니다. 3.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릅니다. 4.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합니다. 5.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합니다.
1.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합니다. 당연하겠죠? 결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완벽하고, 가장 옳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과 양심을 믿고 따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늘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한 권 읽고 세상을 논하는 사람입니다. 따지고 묻고, 묻고 따지는 과정을 통해 진실과 진리는 발견 됩니다. 이 과정은 수많은 독서와 셀 수 없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독서를 통해 묻고 또 묻고, 따지고 또 따져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여쭙고 또 여쭙고, 심지어 따지고 또 따져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확신이 들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주님, 제가 듣겠습니다. 주님, 제 입술을 주장하옵소서!” 이것이 존귀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2.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합니다. 간사는 그 시작이 마음에 불의를 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품는다는 것은 계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한 불의를 실행에 옮깁니다. 이렇게 남을 괴롭힐 나쁜 꾀를 세워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간사(奸詐)함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순전히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립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과 악을 행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의 구조가 이런 모습을 양산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조에 편승하는 것이 면책 사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악함을 더욱 구조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사람을 추구하는 성도인 우리는 이기성 혹은 이기심을 부추기거나 정당화하는 모든 시스템이나 프레임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타자를 희생 제물로 자기의 부와 지위를 축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자성의 원형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끔찍하게도 비성서적인 태도입니다. 존귀한 사람은 간사에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3. 어리석은 사람은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릅니다. 패역(悖逆)이란, 글자그대로, 어긋나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패역이란 자체가 이미 여호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거스른다는 것일까요? 도리(道理)를 어긋 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을 어긋 내는 것입니다. 또한 순리(順理)를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마땅한 이치나 도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패역한 말은 ‘자연’(自然)에 반항하고 ‘자유’(自由)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자연’과 ‘자유’의 투쟁입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자연’은 순리고 도리입니다. 반면 ‘자유’는 역리고 도전입니다.
물론 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고, 맘껏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을 매우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특히 경쟁이라는 구실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역리입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자본주의 프로젝트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역리요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존귀한 사람들은 현대 자본주의 프로젝트를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는 다음의 개념들과 연결됩니다. 다음의 개념들은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는 것’과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프로젝트의 특징입니다.
4. 어리석은 자는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합니다. 그리고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몫을 빼앗은 것이고, 몫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린 사람/목마른 사람은 계속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고, 빼앗은 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가 가져온 자율 경쟁이라는 폭력입니다.
물론 욕심이 더 많은 몫을 탐하게 합니다. 그러나 경쟁 제도의 구조화는 욕심/탐욕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넘어 불안하게 합니다. 기회가 닿을 때 더 갖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부추깁니다. 이 불안감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할 몫을 대상으로 탈취/착취 전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매번 어느 누구도 부족하지 않게 생산량을 조절해서 지구 내의 생산물을 낳게 하십니다. 이 생산량으로는 어느 누구도 굶주릴 이유가 없습니다. 목마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굶주리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목마른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매일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10만 명 이상에 이릅니다. 마실 물이 없어 흙탕물을 마시고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심각합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이 굶주려 죽는 사람들에게 가야할 몫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이 목말라 질병에 걸리는 이들에게 가야할 몫이 충분한 물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은 정해진 법과 제도 하에 정당하게 소유한 것이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라고까지 명하신 분이신데,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보시겠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당연하게 보신다면, 존귀한 사람도 아니고, 신앙인의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능력껏 일하고 생산하되, 필요에 따라 함께 나누는 세상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정의를 실천하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헌금해야 하고, 이를 위해 헌금이 쓰여야 합니다.
■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폭력의 특징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라는 표현에서 “그 그릇”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생각을 말합니다. 악한 자는 그 마음/생각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우는 계획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거짓말이 자연스럽고 난무(亂舞)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들의 ‘거짓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까요? 자본주의 프로젝트가 가져오는 장밋빛 미래입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세상,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입발림입니다. 자본주의의 세상은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경쟁’이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능력’은 미(美)요, ‘부’는 진(眞)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짓이 가득한 입발림으로 가련한 자를 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멸할까요? 법과 제도로 멸합니다. 법과 제도를 능력 있는 사람, 부자가 유리하도록 만들어 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익부 빈익빈’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멸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공평을 위한 법과 제도를 요구할 때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복지(福祉)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요 사랑입니다. 성서적 사상인 천부인권(天賦人權)론에 입각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위해 공평하게 몫을 나눠주는 공적 강제가 복지입니다.
이 복지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지만 본래가 성서적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복지는 단지 물질을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가 이를 당연히 하도록 만드는데 까지 관여해야 성서적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희년사상’의 실천입니다. 희년사상이 무엇입니까? 50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고, 모든 담보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실수로 당분간은 힘들어도 곧 원상복귀 된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소유에 대해 자랑하지를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사용할 만큼만 내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서적입니다. 이것을 지향하고 살아내는 사람이 존귀한 사람입니다.
■ 존귀한 사람은 존귀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입니다. 존귀한 사람은 항상 존귀한 일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귀함을 무너뜨리는 일체의 법과 제도에 대해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의 첫 번째는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투쟁의 성격을 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서와 기도를 통해 정당성과 논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와 쓰기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의 혁명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우리 신앙인들이, 우리 존귀함을 입은 자들이 희년정신을 살아내야 합니다. 내 것 중에 몫이 과하게 왔다싶은 것이 있으면 몫을 되돌리는 양심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헌금을 통해서도 할 수 있고, 기부를 통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작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비전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비전교회를 살아내 주십시오. 비전교회는 여러분의 존귀한 삶으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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