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9. 주일설교
갈라디아서 6장 1~5절
자기 살핌, 그리고 자기 짊
■ 일상의 평화를 원하는 것은 누구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일상의 평화는 늘 지속되지 않습니다. 자주 빈번하게 깨집니다. 느낌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화보다 공포와 불안이 우리의 일상에서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인데, 왜 공포와 불안이 더 많을까요?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보다 더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포와 불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재적 불안과 공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으시겠습니까?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사건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탓>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입니다. ‘탓’이란, “이 나쁜 놈아, 너 때문에 이 고생하는 거야!”라며 모든 것을 ‘너의 문제’로 모는 것입니다. ‘반성’이란,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리가, 내가 뭔가 잘못했거나 문제가 있구나!”라며 모든 것에 ‘자기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탓’입니까? 아니면 ‘반성’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기 원하실까요?
■ 1절을 먼저 보실까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
어떤 사람이 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가 발각됐습니다. 얼마나 큰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죄 값을 치러야하는 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죄 값은 응당 치러야 하는 값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나 그가 죄를 저지른 지역의 법 혹은 규칙에 따라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만약 법이나 규칙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선(善)과 악(惡)이 뒤죽박죽 될 것입니다. 옳음과 착함인 ‘선’이 질서여야 하는데, 옳지 않고 착하지 않은 ‘악’이 질서가 될 것입니다. 마치 ‘n번방’이나 ‘박사방’ 같은 일이 어마어마하게 벌어질 것입니다. 악에 의해 세상은 난장(亂場)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불안과 공포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법과 규칙은 필요합니다. 성서도 이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인정도 베풀지 않고 있습니다. 1절에서 보시다시피,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으라고 하시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가 아니라 체벌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범죄에 상응하는 죄 값을 공동체가 정한 체벌로서의 법이나 규칙 하에서 치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인정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생깁니다. 무엇일까요? 악과 악한 행동을 제지(制止)하고 체벌(體罰)하는 것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분리하라는 성경의 지시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행위’와 ‘사람’을 구분하라는 말씀입니다. 대게 이 부분이 늘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행위와 사람이 구분될 수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곳입니다. 혹시 개념상으로는 구분이 될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입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 지침은 왜 유효해야 할까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피조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동과 사람을 구분해서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1절)
“신령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러한 자”는 누구입니까? 범죄한 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란 어떤 것입니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씀씀이’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범죄한 자를 바로잡을 때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나긋나긋, 사근사근 등과 같은 형용사를 떠올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니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의 인권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선을 긋겠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흉악범도 말입니다. 만약 예외 규정을 둔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따라 산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사실 신앙이 아닌 신념을 따라 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따라 사는 것은 가능하지 못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흉악범조차도 온유함으로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탓’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과 사람을 바로잡되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코로나19’ 확진자들 중에 일탈행동으로 욕을 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누가 됐든 말입니다.
■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매우 귀찮은(?) 주문을 하십니다.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주문을 하십니까?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가?’ ‘나는 이들과 같은가, 다른가?’ 등을 질문하며 자신을 ‘반성’(反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반성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보호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이런 시험/유혹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 대해 늘 걱정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싶으셔서 이런 귀찮은 주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라.”
그런데 주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뼈를 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4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언뜻 읽으면 헷갈리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는 자랑할거리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랑할거리가 없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일종의 잘난체로 읽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번역’으로 읽어볼까요?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뼈 때리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비교의식에 대해 일침을 놓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월의식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보다 낫다고 평가할 때 이것은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상대가 나보다 낫다는 사실을 놓친 채 혼자만의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앙적 행동일까요? 3절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새번역) 3절에 의하면, 무엇이 신앙적 행동일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시 스스로에게는 대견하게 여길 수 있는 노력과 결과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도 자랑할 것은 아니라는 겸손한 태도가 신앙적 행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태도를 누군가에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는 순간 신앙적 태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나처럼 겸손하게 살아야지!’라고 말하고, 이를 자랑한다면 그는 이미 겸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겸손은 자랑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겸손도 일종의 자기 책무입니다. 상대에게 건방지게 보이지 않는 것, 상대에게 비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 등은 모두 겸손과 관련됩니다. 이것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낸다는 것은 책무/책임과 의무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이 “자기의 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무는 짐이고, 짐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기 짐”을 지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무슨 짐입니까? 상대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도 내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나만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공평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앙의 유무(有無), 또는 신앙의 깊이를 드러내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은 내 짐보다 상대의 짐이 더 클 때입니다. 내 짐은 가벼운데 상대의 짐은 무거운 짐일 때 이 상황은 무척 억울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신앙의 유무와 깊이가 확인됩니다. 상대의 짐의 무게와 내 짐의 무게를 비교하는 행위 자체로 확인됩니다. 비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비교가 불평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문제가 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가요? 서로 짐을 지는 이유, 상대의 짐을 지는 이유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희생’입니다. 그리고 ‘헌신’입니다. 종합하여, ‘너를 위해 나를 다 내어줌’입니다. 전문용어로, ‘대속’(代贖)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이 대속의 삶을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너를 위해 나를 다 내어줄 때, 진정한 반성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하나 더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상대의 짐에는 성도들끼리의 짐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웃, 심지어 그리스도를 반대하거나 탄압하는 이웃의 짐도 있습니다. 이 짐들도 짊어져야 합니다. ‘선별적 짊어지기’가 아닙니다. ‘무조건적 짊어지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이 세상 모두를 위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혹시 그동안 내가 짊어지는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보지 않았는지요? 혹시 내 것만을 책임지면 된다고 하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신앙인들끼리만 챙기지는 않았는지요? 만약 이러했다면 우리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은 모두를 위한 대속의 태도인데 부분만을 위한, 또는 선별적인 대속을 했다면 철처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이번 27일 금요일에 열린 긴급 ‘G20 정상회의’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함께 사는 것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혼자만 잘해서도, 혼자만 살겠다고 해서도, 혼자만 잘 산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가 깨닫게 한 바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라는 위기를 만나 전세계적 공포와 불안의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도 수반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누리던 풍요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불안감뿐만 아니라 일자리와 수입에 대한 공포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고 깊게 신앙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비전교회 성도들은 어떤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의 짐을 무조건적으로 짊어질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법에 감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 비전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짐만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짊어질 때, 대속의 역사, 구원의 역사에 일조하는 복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의 메시지가 사순절의 절정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됐기를 소망합니다. 참으로 만사를 ‘탓’으로 돌리지 않고 ‘반성’으로 여기는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