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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5. 주일설교
로마서 8장 24~28절
소망은 결코
■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의 중요한 신앙적이면서 윤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 가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 존재적이고 실제적인 가치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신앙적’, ‘윤리적’, ‘존재적’, ‘실제적’ 가치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무슨 의미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설명이 필요하겠죠?
‘신앙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있어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있어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한 규범이라는 뜻입니다. ‘존재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믿음, 소망, 사랑’은 절대적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실제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드러내는데 ‘믿음, 소망, 사랑’은 절대적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교에 있어 생명처럼 여겨야할 가치인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뺀 그리스도교는 상상할 수도 없겠고, 상상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해서도, 덜 강조해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개의 가치는 마치 삼위일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안에는 소망과 사랑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소망’을 이야기 하더라도 믿음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 하더라도 믿음과 소망이 당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믿음, 소망, 사랑’은 결코 별개이지 않습니다.
■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오늘은 ‘소망’을 두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죠?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소망’(所望)은 ‘욕망’(欲望)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헛된 것을 바라는 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합니다. 물론 소망처럼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욕망이지만, 욕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욕망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이야기는 시지프스의 신화입니다.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꼭대기에 바윗돌을 올리려는 무의미한 반복행위를 하는 것이 욕망입니다. 이외수 선생의 책 중에 『감성사전』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욕망과 소망의 차이>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욕망’이라 하고,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소망’이라 한다.
‘욕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고,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욕망이 철저히 이기적이라면, 소망은 매우 비이기적입니다. 욕망이 폭력적이라면, 소망은 희생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욕망을 배제한 신앙, 소망 가운데 사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소망 중에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실까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바로 여기 24절에서 우리는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망이 단순히 욕망이 아니라는 이해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은 ‘구원’과 ‘보이지 않는 것’과 연관 되어 있다는 사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소망은 구원에서 시작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겠죠? 물론 ‘아직’(not yet)이지만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에 근거한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소망’입니다.
■ 그런데 소망은 특징이 있습니다. 24절에서 보시다시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소망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믿음에 기댄 소망임에도 불구하고, 소망은 견뎌내는데 따른 불안감(不安感)을 갖게 됩니다. 이를 25~26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소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에서 여러 어려움을 만나면 믿음이 흔들리면서 소망도 흔들립니다. 어려움들을 잘, 때로는 간신히, 견뎌내다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지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구원의 소망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현실이 이런데 구원이 뭔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렇게 되겠습니까?
혹시 이렇게 구원의 소망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해 회의감에 빠진, 또 다른 말로는 시험에 빠진, 경우를 두고 ‘믿음 없다’고 핀잔을 해야 할까요?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현실이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핀잔하신 것은 아닙니다. 핀잔은커녕 오히려 그런 이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실 뿐입니다.
25~26절을 다시 읽어보죠.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확인하시다시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셨지, 핀잔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죠.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는 성령님의 매우 적극적인 이해를 표현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기막혀서 넋이 나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을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왜 이러시는 거예요?”라며 원망을 할지라도 핀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겠죠?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연약함, 소망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핀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핀잔하시지 않는 이유이자, 핀잔 대신 도우시는 방법입니다. 특히 성령님의 도우시는 간구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말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인 것인데, 이것은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성령님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소망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소망은 결코’ 잘못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후원 아래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잘 설명하시고,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우리를 변명하신다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변명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인간임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 한 우리 중 누구도 잘못될 리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선물로 주신한 끝까지 우리를 도우라고 성령님을 보내셨으니, 우리의 믿음의 삶은 은혜입니다. 그러니 힘내시길 바랍니다.
2. ‘소망은 결코’ 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절은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위로를 늘 받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근거입니다. 모든 것이 뭐가 뭔지 모를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될 때, 우리의 절망감은 극에 달합니다. 속되게 말해, 돌아버릴 것 같은 심리상태가 됩니다. 이럴 경우,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만이 남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결심이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우리가 딱 한 번만 더 참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든 것이 뭐가 뭔지 모를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코스모스, 즉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혼란으로 보이는 여기에 하나님의 이유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조금만 더 참으면, 아니 한 번만 더 참으면, 이 고난과 어려움의 이유가 드러나고,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요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수 안치환씨가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노래로 불러 더 유명해졌지만, 정호승 시인이 쓰신 『술 한잔』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에게 /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 눈이 내리는 날에도 /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이 시는 어느 날 자신의 인생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껴 밤새 쓴 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두고 2012년 7월에 한 일간지에서 그가 진솔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생은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는 인생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인생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나에게 ‘술 한잔’을 사준다. 어떠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의 술을 사준다. 그래서 요즘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었다’라고 고쳐 읽는다. 이 시를 노래로 부른 가수 안치환 씨가 ‘인생이 정말 술 한잔 사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사줘도 너무 많이 사줬다’고 대답했다.”
프랑스의 사상가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가 쓴 책 중, 『도덕에 대한 성찰과 잠언』(Réflexions ou sentences et maximes morales)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소망이 간혹 거짓말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렇다고 소망을 허풍쟁이라고 매도하지 말라. 그것은 사시사철 우리를 즐거운 오솔길로 안내하며, 평생 동행하는 진실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정호승 시인의 고백 속에서도, 라 로슈푸코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뜻을 두신 소망이라면 얼마나 더 분명할까요?!
■ 우리가 만난 작금의 ‘코로나19’ 현실은 암울(暗鬱)해 보입니다. 끝이 어디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란(chaos)스럽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카오스(chaos)를 혼란이라고 번역하지만, 코스모스(cosmos)라고 읽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진리 때문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연에서 보이는 어떤 혼란도 반드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과학에서 카오스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만난 이 혼란은 질서라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합력될 선’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시고, 두신 이상 우리는 결코 잘못 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 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루어지는 소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음으로 기다립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절)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새번역)
신앙이 깊었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가 그의 주저(主著)인 『죽음에 이르는 병』을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쉽게 절망하여 포기하면 마음까지 해친다.” 소망의 반대는 절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하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비전 교우들이 절망에 빠질 때 가만 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탄식으로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만 참고 기다리라고 다독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곧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일이 악(惡)이 아니라 선(善)임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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