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4.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22장 14~20절
우리의 구원은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허술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로 받았다며?” “그렇죠.” “허술하군.” 이들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없이 받은 것이니 허술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공짜로 주는 것이 보통은 허술하잖아요?
물론 공짜로 주는 것이 허술한 것이 많습니다. 받아봐서 알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다 허술한 것은 아닙니다. 그중 쓸만한 것이 제법 되고, 값나가는 것도 제법 됩니다. 공짜라고 다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구원은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빈틈도 엉성함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경악할 정도의 치밀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완벽한 프로젝트로, 촘촘하게 계획된 스케줄에 의한 구원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대박집에서 파는 허술한 과일이 아닙니다. 싸구려 커피도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이 허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의 장면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상에서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입니다. 만찬이야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제자들이 많았으니 자주 잔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만찬은 여느 만찬과는 달랐습니다. 단순히 다른 것이 아니라, 마지막 만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만찬은 여느 마지막 만찬과는 또 달랐습니다. 최고의 기쁨과 극한의 슬픔이 교차하는 만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 그렇습니다. 이 만찬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 있는 만찬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슬픔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슬픔이 있는 만찬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만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최고의 기쁨과 극한의 슬픔이 교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이었기에 이랬던 것일까요? 우주적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류와 우주의 역사에 단 한 번뿐인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기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주적 죽음이자, 인류와 우주의 역사에 단 한 번뿐인 이 죽음이 최고의 기쁨인 것은, 이 죽음으로 온 인류가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게 된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극한의 슬픔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주적 죽음이자, 인류와 우주 역사에 단 한 번뿐인 이 죽음이 극한의 슬픔인 것은, 하나님의 죽으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상황은 너무도 민망하고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우주적으로 극한의 슬픔입니다.
이렇게 최고의 기쁨과 극한의 슬픔이 교차하는 마지막 만찬은 엄숙했고 거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15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은 이 만찬을 벼르셨는데, 특히 여기서 유월절 음식을 나누기를 벼르고 벼르셨습니다. 그것도 고난 당하시기 전에 나누기를 벼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벼르심에는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고난과 유월절 음식이 주는 상징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고난은 분명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음식은 해방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징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얻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상징을 통해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의식을 통해 확증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성찬식을 통해서입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표현하셨습니다. 떡은 몸을 상징하는 것이고, 포도주는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참으로 죄송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죽음은 한 터럭도 예수님 당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롯이 우리의 해방과 구원을 위한 죽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셨습니다. 이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어찌 구원을 허술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받은 해방과 구원은 싸구려 커피가 아닙니다.
■ 그런데 우리가 받은 구원이 싸구려 커피가 아닐뿐더러,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6~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무슨 뜻인가요? 어떤 결심 또는 결단을 선언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즉흥적인 결심 또는 결단이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6절의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와 18절의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는 해방과 구원이 그 계획에서부터 진행과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거져 받은 은혜라고, 선물이라고 허술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급조된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결함도 없는 하나님의 철저한 구원 계획이시고 스케줄입니다.
우리는 이를 에베소서 1장 4~5절, 그리고 17절을 통해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확인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해방과 구원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된 구원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니 허술한 대박집 과일이 아닙니다. 값싼 구원이 아닙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값비싼 구원이 모두에게 값없이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든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구원입니다. 17절입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글자로는 너희끼리만 나누라는 것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나누어 마시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이 잔, 즉 해방과 구원의 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모두에게 값없이 베풀어지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싸구려 커피가 아닙니다.
■ 그렇다면 이 값비싼 은혜인 구원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대박집 과일을 보듯 하지 않고, 싸구려 커피를 대하듯 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니고 다니기에 너무도 부담스런 세상 최고의 보석을 대하듯 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적 태도는, 이 잔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이 떡과 잔을 수시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1. 여기서 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함께 동참하도록 한다는 의미가 큽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반열에 선 여러분은 아직 이 구원의 반열에 들지 못한 이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이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사잇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2. 그리고 떡과 잔을 수시로 기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수고가 얼마나 크셨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셨음에도, 사랑하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참아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잊는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떡과 잔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일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주일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다 교회 규모를 핑계로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또는 성탄절에 맞춰 일 년에 두세 번으로 축소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찬식을 통해 기억해야 할 구원의 은혜와 매번 새롭게 결심해야 할 구원에 대한 감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로써 결코 허술하지 않은 우리의 구원을 허술한 구원으로 나락(那落) 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이유로든 바르지 않은 모습니다.
■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의 구원은 허술한 대박집 과일이 아닙니다. 싸구려 커피도 아닙니다. 우주적 사건이고, 인류사에 다시는 없는 사건입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값비싼 구원입니다. 엄청난 구원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과 일상에서 이 구원의 은혜를 놓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그 누구도 이 값비싼 구원을 싸구려 커피로 전락시키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매 순간 이 구원을 감격스럽게 노래하는 여러분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이웃들과 나누는 여러분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