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7.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24장 13~35절
말씀을 잊으면 모든 것이 염려와 근심
■ 살면서 잊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경험은 보통 트라우마나 우울증으로 작동할 수 있기에 잊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잊는 것이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손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꿔준 돈? 밥 얻어먹을 약속? 행복하고 즐거웠던 긍정적인 경험을 기억하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기억할수록 삶의 활력에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잊으면 손해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잊으면 손해가 막심한데, 그 대표적인 손해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사실을 경험하고 계실 텐데... 허나 잘 못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영적 각성(覺醒)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후, 삼 일 뒤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흘러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처형당하신 예루살렘에 있다가 그곳에서 약 11km쯤 떨어진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면서 최근에 일어난 예수님 처형 사건과 그 시체가 없어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16절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것은 누군가 일부러 그들의 눈을 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에 의해 눈이 가려진 탓이라는 뜻입니다.
왜 가려졌을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입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눈을 가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입견이 사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면 그 편견이 시야를 가립니다. 청각도 가리고, 후각도 가립니다. 감각도 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앞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냥 사람 한 명이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 blind’라고 말합니다.
■ 두 제자는 이러한 영적 blind 상태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물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내용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슬픈 빛을 띤 얼굴로 요즘 예루살렘의 핫이슈를 모르느냐며 예수님께 핀잔을 주었습니다. 18절입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그러자 예수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짐짓 모르는체 하셨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저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로 알아보고 선생님으로 모신 예수님이 사형을 받으셨는데, 그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19~24절) 그래서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처형 때문에도 그렇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도 그렇고 해서 어수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이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예수님과 관련된 저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들의 얼굴빛은 밝지 못했습니다. 슬픈 빛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다면, 이들의 얼굴빛은 슬픈 빛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황한 빛이었어도 안도의 빛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슬픈 빛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앞에 두고 남 이야기하듯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이 장면은 코믹 드라마입니다.
과연 당신 이야기를 하는 이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속상하셨거나 안타까우셨을 것 같습니다. 25~27절의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분명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당신의 고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이야기를 담아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며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하신 것은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출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11km, 근 2시간 가량 그들과 동행하시며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르자 그들과 헤어지고 길을 더 가시려는 제스처를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포커 페이스? 그렇게 시늉을 하신 것입니다. 의도는 제자들이 당신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헤어지자고 할 것이고,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면 예수님을 모실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28~29절입니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의도가 있으셨죠?
참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것은 말씀에 감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씀들이 생생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열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정적인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30~31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영혼이 열린 제자들에게 드디어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시하시고는 바로 예수님을 볼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계속 볼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오히려 기쁨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과연 이러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포함해 들려주신 모든 말씀을 기억하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기억을 위한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슬픈 빛으로, 염려와 근심으로 살지 않도록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상대로 이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성공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예수님을 드러내지 않으셔도 그들의 신앙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 신앙에 견고히 설 것이라는 판단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슬픈 빛을 띠고 염려와 근심 중에 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판단은 옳으셨습니다. 32~35절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예수님의 판단대로,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뜨거웠던 경험을 고백하며 공유하였습니다. 그리고 11km를 다시 돌아가, 예루살렘에 머물러있던 다른 제자들을 만나 자신들의 경험도 공유하였습니다.
이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들의 경험 공유는 신나고 흥분된 신앙고백 파티였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각각 만난 부활의 예수님이 어떠했는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순간 심장이 어떠했는지 등을 공유할 때, 참으로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흥분 지수는 고조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기억나고 살아 역사하자 모든 제자들의 삶이 살아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슬픈 빛을 띠던 얼굴빛이 천국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보던 편협함에서 인류 구원의 해방자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을 잊었을 때, 제자들의 얼굴빛은 슬픈 빛이었습니다. 소망은 사라지고 절망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믿음은 사라지고 염려에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고 회복되는 순간, 그 이후부터 그들의 얼굴빛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어떤 핍박도 두려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할 따름이었고, 오직 찬양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씀을 통해 교제했습니다. 35절처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자신들의 은혜 체험을 공유했습니다. 교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행위는 말씀을 잊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 거룩한 행위가 계속되는 한 염려와 근심은 오다가도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와도 곁길로 빠질 것입니다. 참으로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 바라기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대로,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사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사실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