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4.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24장 36~53절
능력을 입을 때까지만 이 성에 머무시게!
■ 학기가 시작되면, 첫 번째 시간에 한 학기 동안 공부할 내용과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제 딴에는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친절하게 잘 설명해 줍니다. 심지어는 그 다음 주에도 한 번 더 설명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친절하고도 자세한 설명이 있었음에도 또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레포트는 어떻게 쓰냐, 시험은 어떻게 보냐, 심지어는 이 과목의 주제는 어떤 의미냐 등을 묻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는 저는 짜증이 날까요, 안 날까요? 짜증을 낼까요, 안 낼까요? 순전히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와 같은 경우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이미 충분히 설명하셨던 부분에 대해 제자들이 질문하고 의심하는 태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있겠죠?☺
■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당황하던 제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의 천사 만난 이야기를 듣고 설왕설래(說往說來)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더 이상의 설왕설래를 멈추게 했습니다. 대신 간증 파티가 벌어졌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이때다 싶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열두 제자인데, 왜 열한 제자가 됐는지는 아시죠? 배신하고 자살한 가룟 유다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궁금해했고, 그리워했던 예수님이 정작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며 나타나시자, 제자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37절입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동안의 분위기로는 ‘이야호~’라고 환호성 하며 예수님을 맞이할 것 같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놀라고 무서워한 것입니다.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왜 이런 것일까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추측은 예수님이 야단치시며 자신의 몸을 보여주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38~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는 전혀 다른 몸이 아니고, 전혀 다른 예수님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코 환영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을 가졌고, 결국 예수님은 결정적인 행동 하나를 통해 그들의 의심을 벗겨내셨습니다. 40~43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잡수시더라”
이렇게 의심을 벗겨내 주시고는 그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44~48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의심을 벗겨내신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물질세계에 익숙한 그들의 의식을 의심의 방에서 확신의 바다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정확한지 확인시키심으로 말씀에 굳게 서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의심의 세계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 승천 이후에는, 주로 후자에 집중하십니다.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인 성경을 통해, 의심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시고, 구원의 세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직접 뵈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조심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가장 건강하고 안전한 태도는 성경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통해 확신을 주실 때, 두 가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46~48을 다시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하나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일어나는 회개의 역사가 온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온 세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다시 사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과 나라에 펴지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식으면, 이어서 다른 곳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이곳이 식으면 다른 곳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쉬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식었다가 다시 일어나기도 합니다. 비전교회가 이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이 모든 예언의 증인이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복음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의 증인이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확인의 메시지가 아니라 사명을 부여하시는 메시지였습니다. 48~49절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하시고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유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지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머무는 기간은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였습니다. 결국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말씀하신 이유는 복음과 구원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말씀은 사명을 부여하시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방황하거나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말씀의 확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기억 못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말씀의 확신 가운데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위로부터의 능력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는 지시에 순종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보이시지도 않고, 그들 곁에 계시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일절 의심도 없이, 오히려 기쁨 충만한 가운데 순종했습니다. 50~5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제자들은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확신 가운데 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시에 따랐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말씀이 그들 가운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신 중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씀의 역사’라고 합니다.
힘 중에 가장 큰 힘이 말씀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삶 안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 대표적인 태도가 확신과 당당함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52절과 53절의 모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수님의 처형 이후, 제자 그룹은 의기소침했습니다. 정치적·종교적 압박에 기운을 다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어오자 확신이 생기며 당당해졌습니다. 그들의 기운을 빼앗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찬송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매일! 와우~ 이 얼마나 당당한 행보입니까! 참으로 말씀의 역사입니다.
■ 그런데 이러한 당당함의 행보에는 예수님의 또 하나의 지시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을 입을 때까지만 예루살렘 성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48~49절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증인”입니다. 십자가의 증인,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은 성령님의 능력을 입어야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명을 무너뜨리고 훼방하는 세력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40일 금식을 하신 예수님조차도 공략하려 했던 그 세력입니다. 그러니 능력을 입지 않으면 이 사명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능력을 입기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입을 때까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입는 순간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받은 사명이 증인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는 증인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능력을 입을 때까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는 증인입니다. 증인은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기 위해 떠나야 하고, 다녀야 합니다. 증인은 찾아가는 사람이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증인의 사명이 오고 가는 모든 제자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바로 비전 교인들에게도 부여된 사명입니다.
■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입니다. 자, 능력을 입었으면 나가십시다. 나가서 전하십시다. 나가서 앞마당을 넓히십시다. 이것이 주님의 지시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