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봄기운과 함께 빠른 쾌유 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정미홍 대표님과는 오세훈시장 재임시절 창의제안 심사관으로 서울시청에서 한자리에 앉아 심사한 인연도 있습니다. 그당시 서울시 정책우수상을 받은바 있고 그 이후로도 몇차례 정책상을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중조부님의 인내와 투자가 있고 정의감과 애국심에 대한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경찰에서 근무할 때 흉기를 소지한 강력범을 한시간 반 겪투 끝에 중상을 입고도 검거 해 지금까지 고생하며 상이처 치료와 간암으로 고생하고 있는 국가유공자입니다.
어제 정미홍 대표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번 만나게 되실겁니다
naisjbk@daum.net 자세한 자료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달에 증조부 항일독립유공자 심사가 이루어져 98주년 3.1절에 발표합니다. 그래서 그 일로 잠을 잘 못이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전에 한번 인터뷰나 대담이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뉴스전문 채널에서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데 몸이 좋지 않아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네요. 금년 3.1절이 증조부 자료발굴 40년 되기 때문에 꼭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인터넷 검색 경성형무소 하면 많은 보고 자료가 나옵니다.
보내드린 동영상 자료만 보셔도 대충 아시게 되고 많은 자료와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사오니 검토 바랍니다.
예 알았습니다 수요일날 오전10시에 정미홍대표랑 회의하는데 그때 한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인터뷰 할려면 내용등 시나리오가 있어야 되는데 제가 아직 정확한 내용을 모르니까 대략적으로 이야기 해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타이틀은 어떻게 하는것이 좋은가요
얼마전 3.1절이 오기 전에 마포 경성형무소 자리인 서울서부지방법원. 검찰청 앞을 다녀 왔습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정부인 것 같습니다. 애국혼령이 살아 구천을 맴도는 역사의 현장이 표지석과 안내판 하나가 그자리를 지키고 있어 씁쓸하네요.
일제 강점기 마포 경성형무소는 어떤 곳인가? 이곳에서는 일제의 어떠한 만행이 이루어지고 항일독립투사들을 어떻게 탄압하고 고문하며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살아남은 애국지사와 그곳에서 옥사하신 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왜 전두환 군사정권은 부지를 매각하고 나머지에 법원과 검찰청을 지었는가? 그리고 이곳의 역사적의미는 무엇이며 국민들에게 왜 제대로 홍보를 하지 않아 서대문형무소나 경성형무소나 동일한 형무소 알고 있는 역사적 오유를 개선하지 않고 있으며 이곳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하시다 옥사하신 분들을 재대로 발굴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가? 정말 정부는 역사의식이 있는가?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은 할 의지가 없는가? 나라위해 받치신 고귀하고 숭고한 희생이 잊어지고 빛이 바랜 채 잃어버린 애국으로 묻혀가고 있는 현실에 정부의 대책과 계획은 있는지가 촛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는(경성형무소)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서울에 세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경성감옥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신설되어 경성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8.15 광복이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마포형무소 건물은 이전 후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이곳이 진정한 경성형무소 모습입니다.
마포형무소 1912년 9월 3일 마포구 공덕동 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과 서울지방검찰창 서부지청 자리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신설됐다. 이 때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기존의 경성감옥(1907년 설치)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당시 경성감옥(마포형무소)은 기결수만을 수용하던 곳이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감되기도 했다.
1923년 5월5일 ‘감옥’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형무소’란 이름이 붙게 되고, 남녀 분리 수감으로 서대문형무소에는 여자 수형자가, 이곳 경성형무소에는 무기수와 10년 이상의 남자 수형자가 수감되어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항일독립투쟁 기간 경성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치르며 순국하기도 했다.
경성형무소는 해방 후 1945년 11월 21일 서울소재 형무소가 1개로 통합되면서 ‘서울형무소’ 지소로 운영되다 이듬해 3월 28일 ‘마포형무소’로 승격되었다. 곧이어 6·25를 맞게 되는데 서울에 최초로 진입한 북한전차부대는 제일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좌익범들을 풀어주고 우익의 주요인사들을 색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던 마포형무소는 1963년 9월 3일 교도소 직제개편으로 마포교도소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곧 모든 시설과 수용인력이 안양교도소로 이관되면서 마포형무소는 문을 닫게 된다. 안양교도소로 이관 후 빈터로 남아 있다가 경서중학교가 들어섰고 1992년 경서중학교는 강서구로 이전되었고, 지난 1994년 서부지원과 서부지청이 들어섰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1994년 이곳에 ‘이곳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유적지’라는 표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