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서전
조광현
“조 선생, 이번 글도 참 좋았소! 환자에게 서사 의학적 접근이 꼭 필요함을 알았소.”
P 선배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부산의 모 일간지에 2달에 한 번꼴로 <인문학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이번엔 「서사 의학, 그 언저리에서」라는 졸문을 게재했는데,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그의 격려가 큰 힘이 되긴 하지만, 칭찬이 너무 과하다고 했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또 지난날을 회고했다.
“당신, 그때 세 사람을 동시에 살렸잖아! 멋진 서사(敍事)였지. 그때 난 정신 없었지.”
사실 이번 칼럼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그가 말한 그때는 벌써 35년 전이다. 그러니까 1986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저녁, 그로부터 긴박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조 선생,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당장 택시를 타고 수술실로 와 줘. 아무것도 묻지 말고 빨리, 빨리!”
대학 선배인 그와 함께 B 대학 병원에 근무할 때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여덟. 어렵사리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우리 병원에서는 처음으로 심장 수술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라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빨라도 30분은 걸릴 거리인데….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하여 수술장으로 뛰어 올라가니,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가 속히 제2 수술실로 가자고 재촉했다. 보통 일이 아닌가 보다! 수술실로 들어가니 집도(執刀)하고 있던 P 선배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 선생, 큰일 났어! 무조건 수술 필드로 들어와. 이러다 환자가 죽겠어!”
48세의 여자 환자. 좌측 목의 하부에 날카로운 칼에 찔린 상처. 선배가 잔뜩 누르고 있는 환부에서 살짝 손을 떼자마자 붉은 피가 세차게 뿜어 올랐다. 혼비백산한 그를 향해 나도 큰소리로 외쳤다.
“더 세게 눌러요! 경동맥 파열 같습니다. 속히 혈관의 기시부를 잡아야지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빨리 가슴을 열고 기시부를 잡아줘!”
경동맥은 대동맥의 중요 분지로 뇌로 가는 혈관이다. 출혈이 얼마나 됐는지, 혈압이 뚝 떨어졌다. 나도 크게 당황했다. 경험도 없고 자신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그가 환부를 꾹 누르고 있는 동안, 환자의 가슴을 덮고 있는 소독복을 젖히고, 앞가슴뼈 중간 부위를 상하로 길게 절개했다. 일컬어 ‘흉부 전방 정중 절개’로 심장 수술 시 흔히 적용된다. 곧 심장과 심장에서 나가는 큰 혈관들이 모두 노출됐다. 됐어! 혈관 겸자! 기구를 받아 든 나는 좌측 경동맥의 시작 부위를 어렵사리 크램핑했다.
“선배님. 이제 손을 떼 보세요!”
그가 조심스레 손을 뗐다. 더 이상 피는 뿜어 나오지 않았다. 후유! 일단 큰 위기를 벗어났다. 그제야 다소 여유를 부리며 목의 상처를 더 절개하여 내부를 살펴보니, 왼쪽 쇄골 하부에서 경동맥이 상하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심장에서 나오는 피가 상처를 통해 세차게 뿜어 나왔으니 과다 출혈로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목 부위의 절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처였다.
찢어진 혈관을 수선하고, 경동맥을 잡았던 겸자를 풀어 잠시 멈췄던 혈류를 재개하고, 수술 상처를 세척하고 봉합했다.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 태풍이 지나가는 자리처럼 어지러웠던 수술실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을 수습하지 못한 선배가 무엇에 홀린 듯 말했다.
“세 사람이 죽을 뻔했네!”
세 사람이란 환자와 그의 남편, 그리고 선배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사연인즉. 부부 싸움 끝에 남편이 우발적으로 부인의 목을 찔렀단다. 과도에 찔린 목에서 피가 많이 나서 119를 불렀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응급 수술이 시행됐다. 마침 병원에 머물고 있던 그가 집도자로 나섰다. 환자가 잘못됐다면, 남편과 자신도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라 했다. 토요일 저녁 조용했던 병원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뻔했다고 했다.
다행이다! 남편은 회한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다시는 부부 싸움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위기에 잘 대처한 선배 의사의 노력으로 한 가정에 불어 닫힐 뻔했던 큰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허겁지겁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나는 ‘환자를 살린 사람은 선배!’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선배도 나도 정년 퇴임을 했다. 우리는 이제 수술하는 의사가 아니다.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외과 의사로 활동한 지난날이 아련한 추억으로 잠겨 가는데 우리가 만날 때마다 P 선배는 옛일을 들추어낸다. “그때 세 사람을 살려 줘서 정말 고마웠다.”라고. 나더러는 빅 서전(Big Surgeon)이었고, 자기는 스몰 서전(Small Surgeon)이었다고 몸을 낮춘다. 하기야 나는 수술 상처를 크게 내는 흉부외과 의사였고, 그는 작은 상처로 미세 혈관 수술을 하는 정형외과 의사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빅’과 ‘스몰’이기는 하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수술에 상처를 작게 내는 방법이 우선시 되고 있으니, 그것도 무의미한 말이다.
흔히 외과 의사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거나, 현재 좋은 업적을 쌓고 있는 사람을 ‘그레이트 서전’(Great Surgeon), 즉 ‘위대한 외과 의사’라 부른다. P 선배는 당시엔 흔하지 않던 미세 수술 전문가로 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항상 겸손했다. 나는 그가 완전히 절단된 환자의 손가락을 접합하느라 장시간 한자리에 앉아, 때론 꼬박 밤을 새우며 수술에 몰두하여 미세한 신경과 감각까지 복원시키는 것을 보며 참 대단한 의사라 여겼다. 겸손은 모든 덕의 근본이라더니, 덕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그는 결코 지난 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도 주위에서는 다 안다. 그는 또 한 사람의 그레이트 서전이다.
우리나라 의학도들이, 전문과목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큰 수술을 담당하는 과의 선택을 꺼리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여 우리나라 의료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수련 과정이 힘들고 의료사고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지금도 전국 각 병원마다 수술실을 드나들며, 고난도의 수술을 집도하며, 때로는 환자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외과계 의사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다. 이 분들은 분명 의사 본연의 사명감에 충실한 이 땅의 “그레이트 서전”들이다.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조광현
[조광현 약력]
온천 사랑의요양병원 병원장, 인제대학교 명예교수
2006년 <에세이스트>로 수필, <미네르바>로 시 등단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3회(2011~2013)
<한국산문> 문학상(2013), 정경문학상(2015) 수상
에세이스트작가회 회장, 부산의사문우회 회장 역임
현)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 영호남수필문학협회 부산회장
저서: 시집 『때론 너무 낯설다』 수필집 『제1 수술실』, 『그는 왜 오지 않는가?』
(dr-khc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