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프다
이 희
얼마 전에 심심한 사과 공지문과 관련된 논란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웹툰 작가 사인회 예약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데 대한 주최 측 사과문이었는데 이렇습니다.
[예약 과정 중 불편을 끼쳐 다시 한번 심심한 말씀을 드립니다.]
바로 여기, '심심한'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의미를 오해하고 문제를 제기한 겁니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뜻의 심심하다와 혼동해서 하나도 심심하지 않다고 받아쳤다는 것이다. '심심한'이라는 말을 모르다니 독서량 부족과 한자교육을 탓하기도 하고 문해력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기사를 읽다가 정말 이렇게 심각하게만 생각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나도 안 심심하다든지 심심한 사과라는 말 때문에 더 화가 난다 등으로 비난을 했다는데 심심한이라는 말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주최측의 사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말장난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만 사흘, 금일이라는 말도 모르는 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으니 정말 '심심한'이라는 낱말을 모를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독서량이나 한자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사흘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일상생활에서 날자를 1일, 2일, 3일이라고만 했지 하루 이틀 사흘 하고 말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니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초하루, 보름, 그믐날 같은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물 반찬들이 상에 가득 올라오던 정월 대보름은 고사하고 추석명절이 음력 팔월 보름날이라는 것은 알까? 음력이 농사나 고기잡이에는 도움이 되니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아직 음력이 쓰이고 있을까?
그 글을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심심한 사과가 문해력 논란으로 확산하자"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내 기억에는 확산이라는 말은 능동형으로 쓰인 적이 없다. 항상 "확산된다"고 피동형으로 쓰이던 말이다. 국어사전에는 "확산하다"라는 단어가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확산되다, 확산시키다라고만 쓰이던 말이다. 요즘 뉴스 앵커가 코로나가 확산하고 있다고 능동형으로 말해서 귀에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여기서 또 만났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증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코로나 감염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니 접촉을 통해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확산된다고 말해야 옳다고 생각하는데 앵커는 매번 코로나가 확산한다고 말하고 있다. 평생 그렇게 들어 왔고 내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확산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인터넷에서도 확산한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 말이 바뀔지 모르겠다. 늘 그가 진행하는 뉴스를 보면서 신뢰하는 분인데 이 부분은 참 아쉽다. 그가 얼마 전에 말의 혼란을 개탄할 때도 이 말이 생각났었다.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하나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금도"라는 말인데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가끔 쓴다. 어제도 국회의원 한 분이 자기 당 의원을 두고 "금도를 지켜야지 이러면 되느냐"고 개탄하는 말이 방송되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의미로들 쓰는 것 같다. 금지라는 말과 같은 금할 금자(禁)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금도라고 할 때는 옷의변에 금할 금(襟)자를 써서 가슴 부분의 옷섶을 뜻하는 글자고 금도에는 금지한다는 의미는 없고 아량, 도량을 뜻하는 말이니 명백한 오용이다. 정치인들이 계속 멋을 부리다 보면 어느 날인가 국어사전에 두 번째 뜻으로 "정치인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뜻이 추가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신문 지면에 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예전에는 "그이" "저이" "이이"등 자주 쓰였지만 근자에는 눈에 띄지 않던 말이다. 반가우면서도 안 쓰던 말이 다시 나와서인지 "~하는 이들이 많다."처럼 복수로 써야 될 자리에서도 "들"을 빠트리고 있어 아쉽다. "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나는 말에 "아무개"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릴 때 "이 아무개"처럼 쓰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개라 하면 "코흘리개"처럼 낮추어 말하는 느낌이 있다. 예전에 어른들은 아무개라 하시지 않고 "아무"라고 하시던 기억이 난다. 모(某)자는 아무 모지 아무개 모가 아니라고 하셨다. "박아무"라고 하면 말이나 글에 이름을 가렸지만 낮추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처음에 이 글을 시작했던 공지문 논란의 글에는 유명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인이 한 코멘트가 적혀 있다.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한 단어가 가진 의미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를 가진다며, 싸울 필요가 없다."고 '중재'에 나섰다고 한다.
"심심하다"와 "심심한"은 전혀 다른 말이다. 말이야 변하기 마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흔하게 쓰이는 말조차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생겨나 시비가 벌어졌는데 우리말을 지키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앞장서야 할 방송인이 이런 말을 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조차도 두 낱말이 아니고 한 낱말의 두 가지 뜻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하나는 순우리말이고 하나는 한자말인데다가 한글로는 글자가 같지만 발음도 약간 다른데?
말은 생각과 느낌의 표현이고 분류되고 정리된 인식표다. 말의 혼란은 정신적 혼란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관심이 필요하다. 바르고 아름다운 말이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몇 해 전에 상담을 받던 젊은이가 어느 날 자기 기분을 표현하면서 내게 가르쳐준 말이 있다. 우스우면서도 슬플 때 "웃프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웃프다는 말이 참 절묘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희
<dasich7777@hotmail.com>
영동 신경정신과 원장, 의학박사
한국 정신분석학회 회장 역임
대한신경정신과 학회 부회장 역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
국제 펜클럽 회원
저서: << 정신요법>> << 상처받지 않을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