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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아이
곽재혁
“아빠, 물!”
침대에 누운 채 온몸을 배배 꼬며 뒤척이던 딸아이가 벌떡 일어나 나를 흔들어 깨운다. 깜빡 선잠이 들었던 나는 울컥 치미는 짜증을 애써 눌러 참으며 이렇게 답한다.
“그냥 자!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가잖아.”
물 마시겠다는 말은 딸아이가 자기 싫을 때 쓰는 수법임을 간파한 나로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는 거다. 물 한잔에 순순히 다시 침대로 돌아올 녀석이 절대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이대로 녀석의 손에 이끌려 주방으로 나갔다가는 ‘렛잇고 책 한 권만 읽고 잘래!’, ‘타요 퍼즐 한 번만 맞추고 잘게!’ 등의 요구가 줄줄이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
하지만 그걸 다 알면서도 끝내 그 귀여운 거짓말에 넘어가 버리고 만 나는, 어느새 식기세척기 안에서 시크릿 쥬쥬 컵을 찾아 정수기 냉수를 받고 있다. 물 한 잔을 날름 받아마신 녀석은 전용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빼 와서 소파에 버젓이 자리를 잡는다. 결국엔 그 사랑스러운 네 살배기 모사꾼의 요구를 다 들어준 후에야, 나는 녀석을 침대로 다시 연행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거의 매일 밤 우리 집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상이다. 먹이고 씻기는 일은 아내가 거의 전담하는 만큼 재우는 일이라도 내가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노는 게 너무 재미나서 안 자려는 아이를 억지로 재우느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때론 아이를 재우려다 내가 먼저 지쳐 잠드는 일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책 좀 읽거나 글 좀 쓰고 자려던 계획은 번번이 수포가 되고 만다.
이처럼, 에너지를 다 쏟아내지 않고선 잠들기 거부하는 아이를 재우는 일은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대다수 부모에겐 매우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 딸처럼 밤늦게까지 수면을 거부하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고충일 것이다. 아이를 재워야 엄마·아빠의 일과가 끝나는데, 부모가 먼저 지치도록 애가 안 자면 ‘하루를 마무리한 후에 갖는 오붓한 자유와 평화의 시간’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으니 말이다.
“잠든 모습이 제일 예뻐요!”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에게선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 말에 나 역시 십분 동의한다. 온갖 난리를 다 치고 나선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처럼 곱게 잠들어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도 한순간에 다 잊히니 말이다.
불혹의 나이에 늦장가를 든 나는 아직 만 세 돌이 안 된 딸을 둔 늦깎이 아빠다. 직업이 소아과 의사인 만큼 육아에 있어선 나름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과 실제로 맞닥뜨리는 현실 육아는 사뭇 다르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덕분에 나는 ‘밤 10시 이전엔 꼭 재우세요!’라는 현실성 없는 충고를 이제 더는 입에 담을 수 없게 된 대신, 같이 아이 키우는 처지를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육아는 현실이면서 또 다른 배움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고 해서, 나 역시 육아 스트레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순 없다. 불쑥불쑥 화가 나거나 지쳐 도망가버리고 싶은 순간도 없지 않다는 말이다. 빡빡하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순간도 더러 있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암초를 만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별일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를테면 목요일 퇴근 시간 30분 전에, 딸아이의 눈두덩이 무려 2cm나 찢어졌다는 충격적 소식을 듣는 일 따위 말이다.
“유나네 집에 처음으로 초대받아 와서 놀고 있었는데, 안방 침대에서 뛰어놀다가 그만….”
벌어진 상처에서 출혈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지고 입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딸애의 눈두덩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고 이성을 잃은 아내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아내와 딸아이를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먼저 향하게 한 후, 나는 퇴근하자마자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내가 C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딸아이는 막 엑스레이 촬영을 끝낸 직후였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응급실 인턴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후에도, 우리는 대기실 의자에 앉은 채로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엄마, 배고파!”
오른쪽 눈두덩에 두툼한 거즈와 반창고를 붙인 상태로도 주변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던 녀석은 이내 배가 고프다며 칭얼댔다. 저녁을 먹다 말고 안방에 들어가서 놀다가 그렇게 된 거였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하지만 수면 마취를 앞둔 아이에게 음식이 허락될 리 없었다.
대기한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성형외과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했다. 봉합 시술을 할 레지던트 선생님이 곧 내려올 테니 아이를 재워야 한다며, 간호사가 주사기를 가져왔다.
“아빠, 물!”
이제 자야 한다고 아이를 침대에 눕히자, 녀석은 어김없이 잠들기 싫을 때 하던 그 수법을 쓴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아이의 상체를, 아내는 하체를 붙잡았다. 그리고 간호사가 엉덩이에 케타민이라는 주사를 주입했다.
그런데 케타민의 효과는 정말 기가 막혔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빠, 물!’을 연발하며 난리 치던 녀석이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 꺼지듯 의식이 빠져나가 버려서 눈도 다 못 감은 채 잠들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마주한 아내는 그만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가슴이 먹먹해진 나는 애써 고개를 들어 눈물을 삼켰다.
20여 분만에 봉합은 끝났다. 그런데 이젠 아이를 깨우는 게 문제였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몸을 흔들어 봐도, 아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작지 않은 용량의 케타민이 근육주사로 주입된 데다 이미 충분히 졸릴 만한 시간대여서 그렇다는 간호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막상 아이가 깨질 않으니 겁부터 덜컥 났다. ‘이대로 정말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응급실이 떠나갈 듯이 애 이름을 연거푸 불러댔다. 혹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깨어날까 싶어서, 평소 아이가 즐겨 부르는 ‘Let it go’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발광을 다 한 후에야, 아이는 우리가 부르는 말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봉합 시술이 끝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난 자정 무렵, 간호사의 질문에 아이가 명료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간신히 귀가 허락을 받은 우리는 밤길을 달려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우리 부부는 졸려 하는 아이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었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애가 잠들지 않도록 갖은 수를 다 썼다. ‘물 마실래?’, ‘렛잇고 책 볼까?’, ‘타요 퍼즐 맞추기 할까?’ 평소 아이가 잠들기 싫을 때 써먹던 수법들을 다 동원해서, 여느 땐 그렇게 못 재워서 안달했던 아이를 못 자게 하느라 혈안인 우리였다.
평소답지 않게 스스로 자려고 하는 아이를 한사코 깨어있게 하려고 난리 쳤던 그 날 밤 이후, 나는 ‘잠든 모습이 제일 예뻐요!’라는 말에 동의했던 내 입장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요구도 질문도 많은 수다쟁이라도, 말 안 듣고 난리를 피우는 말썽꾸러기라도, 건강하게 깨어있는 우리 딸이 가장 예쁘다!’
이것이 바로, 그날 밤 급선회한 나의 새 입장이다.
첫댓글 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랑하는 딸 얼굴에 상처에 봉합이라
참 기가 막혔겠네요
반전이 돋보이는 좋은 글이군요
아빠 엄마의 애틋한 사랑도 좋구요
수고하셨고 앞으로 더 건강히 잘 자라길 바랍니다
딸바보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ㅎ. 항상 열심히 글을
쓰시고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선생님의 열정에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