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을 기억하라
곽재혁
하루 내원 환자의 1할 이상이 A형 인플루엔자 양성 환자일 정도로 독감이 창궐했던 2018년 11월 중순에 내 진료실을 방문한 바 있는 어느 여고생에 관한 이야기다.
‘고열을 동반한 인후통, 심한 기침.’
그 여고생이 호소한 증상은 전형적인 독감의 그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나는 독감 신속 항원 검사를 시행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A형 인플루엔자 양성으로 나왔다.
검사결과를 알려준 후 처방을 입력하며 격리 필요성에 관해 설명하려는데, 돌연 여고생의 엄마가 내 말문을 막고 나선다.
“진료확인서에는 독감 말고 생리통으로 써주세요!”
앞뒤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요구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며 단호한 거절 의사를 표했다. 사실에 반하는 진료확인서를 허위로 작성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 다른 병원 다시 갈 테니 처방도 입력하지 마세요. 타미플루 처방하면 기록에 남으니까.”
‘그럼, 그러세요!’라고 하고 보내 버리려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모녀의 사정을 좀 더 들어보기로 한다. 그 여고생은 시험을 한 주 앞둔 상태라 이번 주 수업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만약 독감이라는 진단명이 적힌 진료확인서를 제출하면 5일 동안 등교할 수 없으니 수업을 놓치게 된다는 얘기다. 그리고 생활기록부에 오늘 하루 조퇴 처리가 되면 안 되니, 독감이 아닌 생리통이라는 진단명이 적힌 진료확인서를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다!’라는 요지의 설득 끝에, 모녀는 타미플루가 포함된 처방전을 받아서 귀가했다. 사실 그대로 기록된 진료확인서와 함께….
그러나 여전히 마뜩잖아하는 엄마의 표정과 여고생의 원망 어린 눈빛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독감보다 시험을 더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여고생이 안쓰러운 한편, 자녀의 건강보다 생활기록부를 더 먼저 챙기는 엄마가 좀 야속하게 느껴졌다.
내가 결혼을 좀 늦게 한 편이라, 마흔넷의 나이에 아직 세 돌이 안 된 딸이 있다. 지금은 어린 딸이 별거 아닌 시도나 행동 하나만 보여줘도 갖은 호들갑을 다 떨곤 한다. 심지어 변기에 앉아 쉬하는 것만으로도 과도한 칭찬과 뽀뽀 세례를 퍼부어댄다.
그렇게 하루하루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감사하면서도,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가 기저귀를 먼저 뗐다는 소리를 듣고선 알량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 또 부모 마음이더라.
그런데 이처럼 남의 집 아이와 비교하며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걸 싫어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다 보면, 나 역시도 어느 순간엔 아이의 건강보다 생활기록부를 더 우선순위에 두는 야속한 학부모가 되어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간담이 서늘해진다.
처음을 기억한다면….
그저 우리 딸로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그 처음의 설렘을 잊지 않고 고이 간직한다면, 그래도 좀 넉넉한 품으로 내 자식을 보듬어 안는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내 딸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부모.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고단하게 살아갈 내 딸이 힘든 순간이면 언제든 돌아와 안기고 기댈 수 있는, 그런 든든하고 따뜻한 부모 말이다.
분유 먹은 후 트림만 잘해도 그저 기특했고, 눈 뜨고 나를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순간의 기억을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첫댓글 정말 공감합니다
충분히 감사가 넘칠 수 있는 일상
그저 건강히 곁에 있는 이들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우리의 삶이죠
그럼에도
우린 얼마나 욕심을 내고 또 괴로워 하며 살아가는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