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 긴 인연
대학 은사 C 교수님의 6주기 기일(忌日)이 다가온다. 6년 전 5월 16일, 대학 강당에서 치러진 고별식에서 나는 참석자들을 대신해 은사님을 추모하는 조사를 읽었다. 그 날 내 조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선생님! 어제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희 예방의학교실에서 선생님을 포함한 은퇴교수 모두를 초대해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 날입니다. 두 주전쯤 학과 주임교수가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오늘로 날짜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금년에 미수(米壽)를 맞으신 선생님께서 최근 기력이 많이 떨어지시기는 했어도 얼마 전까지 매주 두세 차례 외부활동도 하며 지내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오늘 점심 식사모임에서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겠지만 지금 선생님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영결식을 하면서도 선생님께서 영영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좀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날 나는 나이며 체면도 불구하고 거의 처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조사를 읽었다. 그 만큼 은사님을 떠나보낸 내 슬픔이 컸기 때문이다.
은사 C 교수님은 한마디로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분’이다.
1968년 2월 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4월부터 미국 뉴욕에 있는 병원에 인턴으로 취직이 되어 출국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출국을 보름 정도 앞둔 3월 초, 잠시 시간을 내어 은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평소 세계보건기구며 국제노동기구 보건 자문활동 등을 해 오신 은사님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국제보건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참이어서 은사님께 진로상담을 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내 얘기를 듣고 난 은사님은 잠시 나를 응시 하시더니, 일단 국내에서 예방의학을 시작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말씀과 함께 나에게 대학 조교로 남을 것을 권하셨다. 우선 한국에서 예방의학과 보건학에 관한 기초 훈련을 받은 다음 미국엘 가서 추가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런 은사님의 제안에 나는 당장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망 서렸다. 그러나 곧 이어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드렸다. 가족은 물론 친지들에게도 이미 미국행을 알려놓고 3월 15일 출국 비행기 좌석까지 예약해 놓은 상태여서 이런 내 순간적인 결정은 무모하기까지 한 일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은사님의 제안대로 출국을 포기하고 대학에 남기로 했다. 내 인생행로가 통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은사님도 놀라시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은사님은 이후 나를 정말 극진히 대해주셨고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당신의 말 한 마디에 미국행을 포기한 내 장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조교로 남던 해부터 전국 8개 부속병원 운영을 책임 진 의료원 의무원장과 의과대학 학장 등 기관의 주요 보직을 여러 해 동안 담당했던 은사님은 나에게 많은 일을 시키셨고 나도 신이 나서 밤낮없이 일에 열중했다. 많은 사람들이 쉬 접근하기조차 어려워하는 은사님을 나는 거의 매일 스스럼없이 만나며 지냈다.
전공분야 학문 연구나 기관 운영에 남다른 능력을 가지셨던 은사님은 대학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은사님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인간적인 분이셨다. 은사님과 함께 한 그 긴 시간동안 내가 경험한 그의 속 깊고 따뜻한 인간미에 대한 에피소드 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나를 거의 충격으로 몰아넣은 감동적인 일 두 가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나는 1970년대 초, 은사님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며칠간의 회의를 마치고 귀국을 하루 앞 둔 날 저녁, 은사님은 나를 호텔 당신 방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미화 100불짜리 한 장을 주시며 학과 교수 한 분을 위해 선물을 사라고 하셨다.
사실, 당시 우리 학과에는 은사님과 내가 남 달리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놓고 나에 대해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교수가 한 분 있었다. 학과의 질서를 어기고 내가 너무 버릇없이 군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와 나 사이의 원만치 못한 관계를 눈치 챈 은사님께서 나름 걱정을 하고 계셨다는 증거다. 나는 한 동안 할 말을 잊고 뜨겁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느라 애를 써야 했다.
또 하나는, 1970년대 내가 미국 대학원에 유학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은사님께서 마침 며칠간 스위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 회의에 참석하시면서 나와 아내를 위해 조그만 스위스 초콜릿 한 상자를 우편으로 보내신 적이 있다. 그 때 우리 부부는 얼마나 놀라며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서울을 떠나시면서 우리가 사는 미국 집 주소를 미리 챙겨 가신 은사님의 그 자상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후 나도 은사님을 닮아 후배들을 배려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해 봤지만 그의 체화된 인간미에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었다.
나도 이제 대학을 정년 퇴직한지 10년이 더 지났다. 요즘은 내 일생에서 은사님과의 관계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마저 한다. 사회인으로서의 내 일생이 거의 모두 그 분과의 짧은 만남과 긴 인연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문득, “현상은 우연이지만, 선택과 의지에 따라 그것은 필연이 될 수도 있다.”라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린 에세이 5/6월호, 멘토-인생의 등불)
첫댓글 스승의 날을 맞아, 6년 전 작고하신 은사님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름다운 인연이네요
이처럼 좋은 만남이 모든 회원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