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권 경자
저녁 무렵 산책길이었다. 양팔을 교대로 오르내리는 기구로 신나게 몸을 풀고 있었다. 잠시 후 옆에 있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 양손을 동시에 놓아버렸다. 남편에게 가는 내 등 뒤에서, “아주머니! 갑자기 손을 놓으면 어떡해요. 다칠 뻔 했잖아요!” 격노한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60대 중반의 여자였다. 나와 반대편에서 같은 운동을 하고 있던 분이다. 이 기구는 다른 곳의 같은 기구보다 앞 사람과의 거리가 짧고 줄도 가벼워 불안정했다. 탄력이 붙어있던 줄이 그 분 쪽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아 차렸다.
”어머나, 미안합니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평소 조심성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정말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인사를 했다. 고개를 올리니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지고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아지매,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왔지요?” “아, 예” “아지매, 한국에서 산지 오래 됐지요?” “아, 예”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남편이 눈치를 채고 “이거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양쪽 줄을 가운데에 모아 아래 부분을 묶어 주었다. 나는 우스웠다. 당연히 그리 하는 줄 알고 있고 항상 야무지게 했는데 남에게 손톱만큼도 피해주기 싫은 성격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남편 왈, “나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제가 잘못했는데 주의부족이었어요. 다치지 않고 정말 다행이에요. 만일에 눈에 상처라도 입히면 큰일 나잖아요. 앞으로 그 기구는 쓰지 않겠어요”
나는 걸으면서 계속 생각을 했다. 그 아주머니는 어떻게 족집게처럼 맞추었을까?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지매, 일본에서 왔지요” 란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일본교육을 받았으니 억양이나 작은 행동 모두가 남다르게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몸에 배었고 습관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 상대를 놀라게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내가 다르게 보이는 걸 인식 한다. 오래전에 만났던 일본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이분은 한국에 시집 와서 한국인 남편과 산다. 언젠가 초등학생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단다. “엄마, 엄마가 집에서 가르친 대로 학교에서 하면 우주인이 되고 왕따 당하니까 학교에서는 엄마 시킨 대로 안해요” 나는 그 애 말에 공감을 했다. 외모는 구분이 되지 않아도 행동 양식에는 많은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1980년대 대학교수인 남편과 제자와 함께 일본 우에노에 있는 한국식당에 갔을 때였다. 그 식당은 한국에서 일하러온 아가씨 직원들이 많았다. 우리팀 담당아가씨를 보고 한 남학생이 장난기 섞인 말투로 나를 가리켜, “이분은 한국인일까요, 일본인일까요?” 물었다. 아가씨는 나를 한참 보다가 망설이면서 일본 사람이라고 답했다. “땡, 한국 사람입니다” 하니 “이상하다 이해가 안 가요. 이때까지 얼마나 일본사람처럼 보이는 한국인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일본인도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데” 그 학생은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 웃었다. 나는 난감했다. 분명 한국핏줄인데 내가 일부러 일본사람을 닮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긴 적도 없다. 나름 한국인이란 자부심도 애국심도 남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일본에서 살고 일본교육을 받았다고 일본사람이 되지 않았다. 재일 교포 2,3세들이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는 사람이 많아진지 오래되었다. 나는 조국에 와서 한국인으로 떳떳하게 살아 있으니 감사하다.
초등학교 입학하자 일본국기 ‘히노마루’를 그리게 했다. 그것을 아버지에게 보였더니 아버지 얼굴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전혀 좋아하지 않고 잘 그렸다고 칭찬도 해 주지 않고 약간 슬퍼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민단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아버지에게 보여드렸을 때는 환하게 웃으셨다. 아주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셨다.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
하나 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표정이 잊혀 지지 않는다.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4월 29일이었을 것이다. 천황의 생신이다. 그날은 국화 모양의 홍백 화과자를 전교학생에게 주고 수업도 일찍 마치고 반은 공휴일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과자를 드렸다. “이걸 학교에서 받았어요” 했을 때 아버지의 흥분에 가까운 상기된 얼굴, 이제 와서는 그때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고도 남는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으로 살아냈던 비애, 억울함, 수모 등등 가슴속깊이 쌓인 복잡한 감정이 노출되는 것이었던 게 아닌가싶다. 교포1세 어르신들은 2세에게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살아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일본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장기를 그리고 천황을 찬양하기 위한 화과자를 받고 오니 아버지로서는 고뇌를 많이 하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의식적으로 했는지는 모르지만은 그 시절 아버지는 교포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특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행사는 매년 거행한 8.15기념식이다. 버스를 대절하여 도쿄 시부야 공회당에 전국에서 집합한다. 대형 스크린에 한국 군대의 당당한 모습이 보여 지던 때의 함성, 기립박수, 눈물범벅, 그 웅장한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민단 단장으로 활약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자세가 나의 정체성 확립에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어르신들은 낮에는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밤에는 2세들 미래교육을 위해 많이 애쓰셨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고마운 마음이 절실해진다. 초등3~4학년쯤 전교 조례식 때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제창하는데 나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여자 담임이 내 옆에 왔다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나가 다른 선생님들이 서있는 앞자리로 갔다. 옆에 있던 남자 체육선생님에게 내 얘기를 귓속말로 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어떤 날은 하노마루 국기를 손에 들고 큰 도로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봤다. 한 친구가 나한테 국기를 주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국기를 흔들지 않고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갔다.
그 당시 미치코왕비(황태자 부인)가 친정인 치바켄에 왔다가 도쿄황거로 가는 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근처 도로를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려 했던 것이다. 모두 국기를 흔들고 환영했지만 나는 조용히 보기만 했다. 그때 차안에서 하얀 모자를 쓴 왕비가 창문을 조금열고 고개를 15도정도 숙이고 손을 흔들던 모습을 봤다. 나는 손에 들었던 일장기를 아까 줬던 친구에게 던지다시피 주고는 먼저 집으로 왔다. 그때 이 사람들이 우리 민족에 큰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혔던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여태껏 마음속에서 일장기와 천황 기미가요를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살아왔다.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세계는 변한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언젠가는 위화감 없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흔들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꼭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산다.
d-kwon@hanmail.net
권경자
권경자 산부인과의원 원장
일본 도호대학 의학부 및 대학원 졸업
2006년<에세이스트> 등단
부산의사 문우회 회원. 천년약속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