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죽음으로의 先驅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보통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비본래적 삶을 받아들이며 평생을 그렇게 산다. 비본래적 삶이 공허하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대면하면서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가장 고유하고, 다른 가능성에 의하여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하며 규정하지 못하는 가능성’이다. 나의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이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삶의 역사를 갖는다. 나의 죽음은 이런 독자적 역사를 가지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은 철저하게 내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게 부과하는 낯선 규정들은 내가 죽음을 생각할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고유한 나의 죽음은 ‘현존재의 본래적인 진리이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다. 죽음의 경험을 통해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죽음 또한 현존제가 지금까지 집착해왔던 모든 일들을 허망하게 극단적으로 無로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성들에 의하여 능가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죽음 이외의 다른 일상적인 가능성들은 그 동안 부여 받은 절대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올바른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될 때 삶의 목표로 간주되던 보직이나 목표가 사실은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가치밖에 갖지 않으며,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죽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자위한다. 실은 죽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죽음의 시간은 규정될 수 없기에 무규정적인 가능성이다. 죽음은 언제라도 침입이 가능한 ‘항상 임박해 있는 가능성’이다. 남의 죽음을 보고도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안도하고 죽음이 멋 일인 것처럼 여기며 죽음에서 도피한다.
이에 반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직면하면서 일상적인 것들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자각하면서 앞서 달려감’, 즉 ‘죽음으로의 先驅’라 하였다.
우리는 어느 순간 삶의 무상감에 강하게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 순간에는 소중했던 것들이 무가치해지고, 집착해왔던 삶 전체가 무의미하고 공허해진다. 이런 감정은 의도해서 된 것이 아니고 근거도 없이 찾아와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데 하이데거는 이런 기분을 불안이라 불렀다. 불안이 찾아오면 그 동안 안주해왔던 일상의 세계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불안한 상태를 하이데거는 무화(無化)에 떨어진다고 했다. 이때 우리는 고독해지고 혼자가 되어 그 어디에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이전에 집착했던 모든 존재자인 돈, 명예, 가족, 사회, 국가, 인류나 심지어 그 동안 섬겨온 신도 이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다른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 앞에 직면한다. 그 동안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명하게 생각하면서, 세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안전하게 하고 자신의 위상과 평판을 올리는 데만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 반면에 이제부터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큰 수수께끼로 경험한다. 그는 어떤 존재자로도 환원될 수 없는 비밀스런 자신의 존재 앞에 직면한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이란 내가 진정하게 실존하도록, 즉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자각하면서 그것을 책임지도록 몰아대는 기분이다. 또한 불안에서는 현존재나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낯설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들어난다.
불안은 한편으로는 그 동안 자신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재(인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가 타인의 해석으로부터 돌파하면서, 타인들의 해석에 의해서는 나타나지 않던 낯선 얼굴들을 들어낸다.
이런 불안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우리는 불안을 통해 현존재(인간)의 실존적 성격, 즉 자신의 존재 전체를 문제 삼는 현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이 가장 잘 들어난다고 보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존재 전체가 갖는 수수께끼를 가장 잘 첨예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은 죽음을 의식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불안을 억눌러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기에 늘 우리의 존재 밑에서 일렁거리고 있다. 다만 억눌러서 잠재하고 있기에 근거 없이 언제나 엄습해오고 있다. 이 불안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낯설고 섬뜩하여 어떤 고통보다 더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을 용기 있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연옥 불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숭상하는 가치들에 연연해하고 그것들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던 왜소한 인간이 아니고, 모든 존재자가 들어내는 유일무이한 충만한 존재에 감응하는 열린 인간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나의 존재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는 재앙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환히 드러내주면서 그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고 있다. 하이데거의 이런 입장이 바로 ‘죽음으로의 선구’이고 ‘죽음을 향해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이다.
불안이 우리를 본래적인 실존의 문턱으로 이끈다면,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수하면서 죽음을 향해 선구하는 것은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이때 불안은 기쁨으로 전환된다. 이런 기쁨 안에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세계가 눈앞에 열린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태를 ‘불안을 인수할 때 현존재(인간)은 존재자 전체가 있다.’라고 하였다.
불안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단순이 우리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으며, 분명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도피하지 않고 불안을 적극 인수하게 되었을 때,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비스럽고 경이롭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을 수용하고 죽을 향해 선구하는 것이야말로 세계가 자신을 근원적으로 나타내지기 위해 현존재(인간)가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존적인 수행이다. 인간(현존재)이 죽음을 향해 선구적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본래 가능성을 수용할 때만 세계는 보다 순수하고 근원적으로 펼쳐질 수 있다. 전체, 즉 세계가 근원적으로 펼쳐질 때, 현존재(인간)는 존재자들의 더 근본적인 존재에 자신을 열게 된다.
(6)본래적인 시간성과 전통 형이상학의 해체
죽음으로의 선구는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시간성으로 드러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선구하면서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 자신의 장래로 나아가는 동시에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거를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현재가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현재에서는 현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자가 자신들의 진리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이런 본래적 현재를 순간(Augenblick)라 부른다. 이렇게 고유한 장래를 향해 나아고 자신의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순간으로서 경험하는 것을 ‘본래적 시간성’이라 했다. 이런 본래적인 시간성에 입각하여 하이데거는, 현재의 존재 의미를 ‘旣在하면서-現轉화하는 장래’를 의미하는 시간성으로 파악하였다.
현존재(인간)은 현존재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이해되는 존재 이해의 장이다. 이는 현존재가 본래적인 시간성으로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자를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존재가 근원적으로 이해될 수 잇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존재와 존재자들의 존재를 포괄하는 존재 전체가 현존재의 시간성을 통해서 開示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이야말로 존재를 이해하는 궁극적인 지평이라고 보면서, 이런 입장에서 존재론의 혁신을 꾀하였다.
존재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존재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신적인, 수학적인, 감각적인 존재처럼 어떤 특정한 존재의 영역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는 생성 소멸하는 존재자들의 근거를 말할 수도 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보통 생성 소멸하는 존재자들의 근거인 신이나 본질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를 이러한 근거로부터 이해하려고 했다.
하이데거 역시 존재를 여러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할 때의 존재를 가리키고, 어떤 특정한 존재 영역을 가리키며, 또한 모든 존재의 영역을 포괄하는 ‘최대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전통형이상학은 이러한 최대의 전체로서의 존재를 생성 소멸하는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근거로부터 이해하려 했지만, 하이데거는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존재’도 ‘최대의 전체적인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다양한 존재 유형과 그것들 사이의 유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최대의 전체로서의 존재가 개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본래적인 시간성의 구현을 존재 자체와 다양한 존재 영역들에 대한 존재론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이런 의미에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시간성을 존재 이해의 궁극적인 지평으로서, 존재의 의미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