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서울대 철학과 박찬국교수 편>
현대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이 대변한다.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 시대에 살고 있다.
실존주의라 할 때 <실존>을 정의 내린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니, 그를 실존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도 있다.
철학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학문이라면, 문학은 삶을 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시, 소설, 수필 등 현대문학은 현대철학인 실존주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가 무엇인지를 읽어보았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하이데거는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서양철학의 혁신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가장 확실한 전제인 죽음을 생각할 때’만 성스러움과 경이 안에서 세계와 사물을 경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존재 전체가 다 열리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어서 사상적 轉回를 겪은 後期의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를 계산이 가능하고 변환이 가능한 에너지’로 보는 고향상실의 현대적 ‘존재 이해’에 맞서서, ‘존재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물의 고유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통해 기술문명이 초래한 위기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새로운 제기
<존재와 시간>의 물음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삶의 의미>처럼 실존적인 물음은 아니고, 존재론적인 물음이다.
존재의 의미라고 할 때, 의미는 존재가 이해되는 영역을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영역(지평)은 바로 시간이다. 하이데거 이전의 전통철학에서는 신적인 존재는 초시간적이고, 수학적인 존재는 비(非)시간적이며, 감각적인 존재는 시간적인 존재로 해석하였다.
하이데거는 ‘지금이라는 시점의 연속=시간’이라는 시간을 ‘통속적인 시간’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성을 영역(지평)으로 하여 다양한 존재 유형과 그들과 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2)현존재의 분석
인간만이 존재를 인식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개나 바위 등의 주변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체득하며 살고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고,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차피 죽음으로 끝나는 허망한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물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면 제대로 사는지 물을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문제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 성격’을 실존(Existenz)라고 하였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막연하나마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존재를 인식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현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은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염려(걱정)하는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말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뇌하며 그것을 구현하려고 노력한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문제자’라고 한 것은, 단적으로 인간은 일회적이며 고유한 존재라는 점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경우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보다는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인간은 각자 각자의 ‘누구’이며, ‘보편적인 류(類)의 한 예’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다.
(1)세계-내-존재
하이데거는 ‘나는 존재한다.’는 의미를 일차적으로 ‘세계-내-존재’라는 데서 찾는다. 이는 말 그대로 어떤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 안에서 존재자들과 구체적으로 관계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 삶에서 존재자(무생물이나 생물)들은 보통 인간의 목적에 부합하거나 그렇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현존재의 목적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연관되어 의미를 갖게 되며,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의 목적, 수단, 지지 연관관계를 세계라고 불렀다.
개개의 존재자들을 접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러한 존재자들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세계로부터 인지한다. 하이데거는 주변 세계를 인지하는 이러한 존재의 성격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불렀다. 현존재(인간)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하려고 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관계하면서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성격을 염려라고 부른다.
(2)천통철학 비판
하이데거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관계하는 것을 고려(考慮)라 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을 배려(配慮)라 하였다. 하이데거는 어떤 사물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겪어서 아는 것이 먼저라(우선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반지를 화학적인 성분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반지에 연관된 사연이나 반지를 직접 껴보고 나서야 비로소 반지에 대하여 잘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존재자들과 온몸으로 관계하면서, 우리는 존재자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다른 인간들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장도리로 못을 박으면서 장도리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전통철학에서는 존재자에 대해 객관적인 지각이나 이론적인 인식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자가 들어나며 그 후에야 존재자와 실천적인 관계가 비로소 가능하다 하고 있다.
(3)비본래적 실존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 존재’를 실존이라고 하지만, 항상 의식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기’보다는 자신이 태어난 특정한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따라 순응하면서 산다. 하이데거는 후자와 같은 삶을 ‘비본래적 (uneigentlich) 실존’이라고 하였다.
‘비본래적 삶’이란 내가 나의 고유한 가능성을 구현하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 을 말한다. 이 경우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익명의 주변 세상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산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은 잡담과 호기심, 애매성으로 點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침부터 우리는 신문을 읽고 세상일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말초적 호기심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사태에도 깊이 관여하지 못하며 호기심으로 잡담을 주고받을 뿐이다. 잡답과 호기심은 타인과 사태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관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진정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애매성에 사로잡혀 있다.